걸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었던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오히려 영화평론가의 만점 선정 기준이라는 것에 더 깊이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2000년부터 2021년까지 22년간 만점을 받은 외국 영화 64편 가운데 단 한 편을 고르는 작업,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내 취향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됐습니다.

64편의 만점작, 그 선정 기준이란 무엇인가
한 영화평론가가 1년에 평균 세 편 정도에만 만점을 부여한다고 했을 때, 22년이면 수학적으로 66편 내외가 나옵니다. 실제 선정된 숫자는 64편.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단순한 엄격함이 아니라, 일관된 미학적 기준(aesthetic standard)의 산물이라는 점입니다. 미학적 기준이란 단순히 "재미있는가"를 넘어, 연출 방식·형식 실험·감정의 진정성·영화사적 맥락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잣대를 말합니다.
제가 직접 이 목록을 훑어보면서 느낀 건, 상업적 흥행작보다 작가주의 영화(auteur cinema)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주의 영화란 감독 개인의 세계관과 스타일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영화를 뜻합니다. 왕가위의 화양연화,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가 대표적입니다. 이 세 편은 장르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감독의 개인적 집착이 영화 전체에 배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물론 다크 나이트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은 작품도 목록에 포함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중 영화는 걸작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형식의 완성도와 감정의 보편성이 동시에 달성될 때, 오히려 더 넓은 의미의 걸작이 나온다고 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그 증거이기도 하고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로마, 칠드런 오브 맨, 그래비티 세 편을 모두 목록에 올렸음에도 최종 라운드까지 단 한 편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그의 작품이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만점 영화끼리의 대결에서는 취향의 우선순위가 결정적으로 작동한다는 방증입니다.
- 연간 평균 만점 부여 편수: 약 3편 (22년간 총 64편)
- 작가주의 영화 비중이 높음: 왕가위, 카락스, 폴 토마스 앤더슨, 벨라 타르 등
- 다큐멘터리 포함: 액트 오브 킬링,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등
- 애니메이션 포함: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업, 늑대아이
- 최종 우승작: 마스터 (폴 토마스 앤더슨, 2012)
취향의 문제: 걸작이 나에게 걸작이 아닐 때
제가 처음 화양연화를 봤을 때 솔직히 말씀드리면,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느리고, 이야기보다 분위기가 앞서고, 두 주인공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시의 저한테는 그냥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다시 봤을 때는 달랐습니다. 좁은 계단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가 그렇게 오래 남을 줄 몰랐습니다. 영화의 본질이 사건이 아니라 '닿지 못하는 순간'이라는 걸 그때서야 이해했습니다.
이 경험이 말해주는 건, 영화 감상에서 서사 수용력(narrative reception)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서사 수용력이란 관객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와 정서를 어느 깊이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같은 영화라도 관객의 나이, 경험, 감정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어렵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데이비드 린치가 구사하는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 즉 시간 순서를 의도적으로 해체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은 익숙한 서사 문법과 전혀 다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평론가 만점 영화는 무조건 재밌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전제 자체를 조심스럽게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번 목록에 포함된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은 흑백 화면에 대화가 거의 없고 러닝타임이 두 시간 반에 달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이런 위대한 영화가 만들어지는구나"는 경외감을 주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반응 모두 틀리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보기 불편한 영화가 오히려 오래 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액트 오브 킬링(Act of Killing)처럼 실제 학살 가담자들이 자신의 범행을 연극으로 재현하는 다큐멘터리 형식, 즉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독특한 방법론은 처음엔 불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쾌함이 가라앉은 자리에 인간의 악의와 자기합리화에 대한 질문이 남습니다. 출처: IMDb, The Act of Killing(2012)
최종 우승작이 마스터(The Master, 2012)라는 결과도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는 컬트 집단을 소재로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비호감이고, 서사는 전통적인 성장 구조를 의도적으로 배반합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이 작품으로 영화평론가협회(New York Film Critics Circle)에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출처: New York Film Critics Circle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왜 이 장면이 이렇게 슬프지?"라는 질문에 끝내 답을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미완의 질문이 오히려 이 영화를 제 머릿속에 오래 붙잡아 두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이동진 평론가가 21세기 최고 외국 영화로 최종 선정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A.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The Master, 2012)입니다. 결승에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와 맞붙어 선정됐으며, 두 작품 모두 만점작이기 때문에 결과가 다소 의외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선택은 어디까지나 한 평론가의 그 순간의 감정적 판단이라고 본인이 직접 밝혔습니다.
Q. 화양연화가 결승까지 올랐는데, 어떤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건가요?
A. 화양연화는 사건 중심의 서사보다 '닿지 못하는 순간'의 감각을 포착하는 데 탁월합니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슬로모션 촬영과 음악, 치파오로 상징되는 시각적 밀도가 합쳐져 60년대 홍콩의 분위기 자체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처음엔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두 번째 감상에서 전혀 다른 영화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Q. 목록에 다큐멘터리도 포함된 이유가 있나요?
A. 영화의 형식을 극영화로만 한정하지 않는다는 기준 때문입니다. 액트 오브 킬링처럼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실험적으로 허무는 작품은 형식 자체가 메시지가 됩니다. 다큐멘터리를 별도 장르로 분류해 제외하기보다, 영화적 완성도와 미학적 성취를 기준으로 통합 평가하는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Q. 평론가가 만점 준 영화가 저한테 재미없으면 제 문제인가요?
A.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감상은 관객 개인의 삶의 맥락, 감정 상태, 서사 수용력이 함께 작동하는 경험입니다. 평론가의 기준은 하나의 안내이지 정답이 아닙니다. 같은 영화도 보는 시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므로, 지금 맞지 않아도 몇 년 뒤에 다시 보면 달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있습니다.
결론
64편의 만점작을 훑으며 제가 새로 배운 건, 영화를 잘 보는 방법이 아니라 제 취향의 윤곽이었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멈추고 싶었는지, 어떤 영화 앞에서 설명이 막혔는지, 그 지점들이 사실 저만의 감상 지도를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평론가의 선택을 참고하되, 거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스터가 우승했다고 해서 화양연화가 덜한 영화는 아닙니다. 두 영화 모두 만점을 받았고, 다만 한 순간의 감정이 하나를 앞세운 것뿐입니다. 저도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몇 년 뒤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작품부터 하나씩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