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가 된 남자의 이야기인데, 왜 읽고 나면 자꾸 내 얘기처럼 느껴질까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그레고르 잠자의 몸이 아니라 그의 걱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벌레가 되어 이불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회사를 빠지면 가족이 굶는다"고 생각하는 그 장면이요. 그 순간 이 소설이 무섭고 기괴한 환상이 아니라, 아주 정밀하게 설계된 불안의 해부도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벌레의 의미 — "쓸모 없는 나"를 가장 정직하게 표현한 방식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이 한때 유행했는데, 처음엔 그냥 귀여운 장난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나서 이 질문을 다시 떠올리니 전혀 가볍지 않았습니다. 카프카는 1915년에 발표한 이 단편에서 평범한 외판 사원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흉측한 해충이 되어 있다는 설정을 씁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어떻게 몸을 뒤집지"가 아니라 "회사에 지각하면 어쩌지, 가족 생계는 어떻게 되지"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춰 몇 분간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레고르의 공포가 신체적 변이 자체가 아니라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프카 연구에서 이 벌레는 단순한 그로테스크(grotesque) 장치로 보지 않습니다. 그로테스크란 현실에서 불가능한 요소를 통해 오히려 현실의 진실을 드러내는 문학적 기법을 말합니다. 카프카의 전기를 들여다보면 이 벌레의 의미가 훨씬 구체적으로 잡힙니다. 카프카는 1883년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보헤미아의 지배 언어였던 독일어를 쓰는 소수 상류층 교육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에도, 체코 문화권에도, 독일어권 주류 사회에도 완전히 녹아들 수 없었던 삶. 그 삼중의 이방인 감각이 그레고르 잠자의 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가난과 차별을 딛고 자수성가한 인물이었고, 아들에게는 법학을 공부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길 요구했습니다. 카프카는 그 기대에 응하면서도 새벽까지 글을 썼습니다. 오전에는 보험공단 직원으로, 밤에는 작가로 살았던 이중생활이 그를 늘 어딘가에 충분히 속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쳐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책을 읽어야 할까?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카프카가 독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출처: The Kafka Project).
결국 『변신』의 벌레는 이런 질문입니다. "내가 더 이상 가족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나는 그래도 사랑받을 수 있는가?" 케임브리지 사전에는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는데, "매우 불쾌하고 무서우며 혼란스러운, 카프카의 소설에 묘사된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이 정의를 볼 때마다 카프카의 작품이 단순히 기괴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불쾌함과 혼란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단어가 생겨났다는 쪽으로 읽힙니다(출처: Cambridge Dictionary).
- 『변신』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뒤에도 가족 걱정을 먼저 한다 — 쓸모와 존재 사이의 긴장이 핵심
- 카프카의 삼중 이방인 감각(유대인·체코·독일어권)이 그레고르의 고립감으로 형상화됨
- '카프카적(Kafkaesque)'은 케임브리지 사전에 공식 등재된 단어 — 그의 불안이 얼마나 보편적 언어가 됐는지 보여주는 증거
- 벌레는 그로테스크 기법의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력한 존재'가 되는 공포의 직접적 표현
카프카적 불안과 조용한 실종 — 악당 없이 밀려나는 삶의 감각
카프카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한 가지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오래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의 불안이 명확한 원인을 갖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가족 때문에, 회사 때문에, 자신의 몸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중 무엇 하나만 없애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편 소설 『선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게오르크 벤데만은 사업도 잘되고 결혼도 앞두고 있는데,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너에게 익사 형을 선고한다"고 외칩니다. 아들은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신 강으로 달려가 뛰어내립니다. 이 소설은 카프카가 연인 펠리체 바우어를 만난 직후,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하룻밤 만에 쓴 작품입니다. 제가 『선고』를 읽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것은 아버지의 선고가 아니라, 아들이 그것을 이해도 못 한 채 수행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종자』에 오면 이 감각이 훨씬 거대하고 느리게 펼쳐집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 문학의 맥락에서 자주 함께 거론되는 이 작품은, 알베르 카뮈가 "시시포스 신화의 현대판"이라고 평한 작품입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선험적 의미 없이 세계에 던져져 있다는 전제 아래,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적 흐름을 말합니다. 카프카가 1911년부터 1914년 사이에 쓴 이 미완의 장편에서 17세 소년 카를 로스만은 미국으로 쫓겨나 외삼촌을 만나고, 상류층으로 올라서는 듯하다가, 다시 가장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카를을 파멸시키는 것은 거대한 악당이 아닙니다. 가족, 노동, 계급, 타인의 판단, 경쟁이라는 힘들이 조금씩 쌓여 그를 밀어냅니다.
저는 카를이 부랑자 무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옆집 발코니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이웃이 카를에게 "가능성 희박한 꿈보다 누군가 밑에서 일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충고합니다. 카를은 그 말을 받아들입니다. 카프카가 그 이웃의 입을 빌려 자기 분신인 카를에게 "그냥 먹고 살기에도 벅차"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읽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에 타협하며 조금씩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잊어가는 과정 자체가 카프카가 말하는 '조용한 실종'일 겁니다. 한순간 증발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동안 정체성(identity)이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 여기서 정체성이란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디에 속하는가에 대한 감각 전체를 말합니다.
카프카 자신도 그 실종을 살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펠리체 바우어와 두 번 약혼하고 두 번 파혼했습니다. 결혼과 글쓰기가 공존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면서도, 속할 기회가 오면 기를 쓰고 피한 사람. 그것이 제가 카프카의 전기를 읽으면서 가장 아프게 기억하는 지점입니다. 카프카는 폐결핵이 악화되어 1924년 6월, 타계 100주기를 맞는 2024년 기준으로 정확히 100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발표 원고를 모두 없애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친구 막스 브로트의 '고마운 배신' 덕분에 『성』, 『소송』, 『실종자』 — 이른바 고독 삼부작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닿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카프카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변한 벌레는 정확히 어떤 종류인가요?
A. 원문 독일어 표현은 'ungeheueres Ungeziefer', 즉 '거대하고 흉측한 해충'입니다. 카프카는 의도적으로 종을 특정하지 않았고, 삽화가가 바퀴벌레처럼 그리는 것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벌레의 정체보다 벌레가 된 사람이 느끼는 감각과 주변의 반응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Q. 카프카 작품은 어렵다고 하는데 처음 읽기 좋은 순서가 있나요?
A. 분량이 짧고 충격이 즉각적인 『변신』부터 시작하는 게 진입장벽이 낮습니다. 그다음 단편 『선고』로 카프카 특유의 아버지-아들 구도를 경험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 장편인 『실종자』나 『소송』으로 넘어가는 순서가 제가 경험상 가장 무리 없이 읽히는 방식이었습니다.
Q. '카프카적(Kafkaesque)'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어떻게 쓰면 되나요?
A. 규칙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왜 그런 규칙인지 알 수 없고, 열심히 노력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 채 결과가 나쁘게 돌아오는 상황에 씁니다. 예를 들어 민원을 넣었더니 담당 부서가 계속 바뀌어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경험이 전형적인 카프카적 상황에 해당합니다.
Q. 카프카가 유언으로 원고 소각을 요청했는데 왜 막스 브로트는 따르지 않았나요?
A.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이미 "나는 네 원고를 절대 없애지 않겠다"고 밝혔고, 카프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브로트를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했습니다. 카프카가 내심 작품의 보존을 원했다는 해석이 많은 이유입니다.
결론
카프카의 작품은 읽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저도 『변신』을 덮을 때, 『실종자』의 마지막 문장을 지나칠 때 편안함보다는 뭔가 안에 있던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말했듯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한지조차 모를 때 펼쳐보기에 적합합니다.
카프카를 처음 읽는다면 『변신』부터,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면 편지와 일기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작품보다 더 솔직한 카프카의 목소리가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