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잃거나 기대했던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 단순히 결과가 나빴다는 느낌보다 내 자신이 가치 없어진 것 같은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다시 펼친 건 그즈음이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불안의 이름을 정확히 짚어주는 책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소유 모드 —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는 착각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처음 꺼내는 개념이 소유 모드(having mode)입니다. 여기서 소유 모드란 자신의 존재를 소유물로 규정하는 심리 상태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대신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로 대답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저도 직접 이 패턴을 꽤 오래 반복해 왔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아챘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학력과 성적이, 사회에 나온 뒤에는 직함과 연봉이 나를 설명하는 가장 편한 언어였습니다. 그 언어가 흔들릴 때마다 저 자신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으니, 전형적인 소유 모드로 살고 있었던 셈입니다.
프롬은 이런 소유 지향적 태도가 언어에도 흔적을 남긴다고 지적합니다. 영어의 have 동사 용례를 예로 드는데, "I have a headache(나는 두통이 있다)"처럼 신체 감각이나 감정, 심지어 생각까지 소유의 대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급격히 늘었다고 설명합니다. 활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줄고 소유를 나타내는 명사가 늘어나는 현상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처럼 소유 지향적 언어 사용 습관은 단순한 문법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신호라는 것이 프롬의 핵심 주장입니다.
프롬은 이 소유 모드가 자본주의 체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자본이 부족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사회는 크고 작은 소비를 통해 지속적으로 '소유의 환상'을 공급합니다. 새 옷을 사고 새 차를 교체하는 순간마다 "나도 무언가를 소유하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리프레시시켜 주는 구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비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 대목에서 소비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설계된 심리적 보상인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소유 모드의 가장 큰 문제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동반한다는 점입니다. 소유물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고, 그 불안을 막으려면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더 많이 가지면 지킬 것도 많아지고, 불안은 줄지 않습니다. 프롬은 이것을 끝없는 땅따먹기 싸움이라고 표현하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으로 정확한 비유였습니다. 제가 실제로 느꼈던 피로감이 딱 그 구조에서 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소유 모드: 소유물·지위·학력 등으로 자아를 정의하는 심리 상태
- 소유의 환상: 자본주의 사회가 소비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가진 자'의 감각
- 소유 모드의 결과: 소유물이 사라질 때 자아까지 무너지는 느낌, 만성적 불안
- 언어와 소유: have 동사의 확대와 명사 중심 표현은 소유 지향적 세계관의 반영
존재 모드 — '나'는 내가 가진 것과 별개로 존재한다
프롬이 소유 모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존재 모드(being mode)입니다. 존재 모드란 소유물의 유무와 관계없이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 및 타인과 열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가진 것이 사라져도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프롬은 이 존재 모드가 학습, 기억, 대화 같은 일상적인 활동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소유적 학습은 지식을 고정된 덩어리로 보고 머릿속에 최대한 많이 쑤셔 넣는 방식인 반면, 존재적 학습은 지식과 자신 사이의 경계가 열려 있어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 모드에서 자기 의견은 포기할 수 없는 소유물이 되기 때문에, 대화가 상호 변화 대신 일방적 의견 표명으로 끝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날은 늘 제 생각이 어느 정도 바뀐 날이었고, 그렇지 않은 날은 말을 많이 했어도 피로감만 남았습니다.
사진에 대한 프롬의 언급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장소에 가면 그 순간을 충분히 느끼기도 전에 스마트폰부터 꺼내던 저의 습관이 정확히 포착된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사진은 남지만, 그때 제가 무엇을 느꼈는지는 흐릿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순간을 소유하려다 정작 그 순간과의 접촉을 잃은 것입니다.
이 책에서 프롬이 인류 역사 전반을 아우르며 강조하는 것은, 욕망 충족과 행복을 동일시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전통이라는 점입니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Erich Fromm에서도 정리되어 있듯, 프롬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마르크스, 불교 사상 등 동서양 문헌을 두루 인용하며 "소비를 통한 욕망 충족 = 행복"이라는 공식이 사실 역사적으로 매우 낯선 발상임을 논증합니다.
존재 모드에 대한 비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소유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충분한 소득과 주거 안정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는 현실의 불평등을 개인의 태도 문제로 돌리는 말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소유는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안정감과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프롬의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핵심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유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증명하려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더 깊이 살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가." 출처: 한겨레가 프롬 사상을 다룬 기사에서도 이 지점, 즉 구조적 불평등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언급된 바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좋아하는 책을 사고 취미에 돈을 쓰고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분명히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소비 자체가 공허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 소비가 '내가 그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치 있다'는 증명의 수단이 되는 순간, 거기서 불안이 시작된다는 것을 몸으로 겪어봤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소유 모드로 사는 게 꼭 나쁜 건가요?
A. 일반적으로 소유 모드는 탐욕이나 물질주의와 동일시되곤 하는데, 프롬의 의도는 그보다 섬세합니다. 문제는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물이 사라졌을 때 자아까지 무너지는 구조입니다. 재산을 늘리고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일이지만, 그것과 자기 가치를 동일시하는 순간 불안의 씨앗이 심어진다고 프롬은 설명합니다.
Q. 존재 모드로 사는 게 현실에서 가능한가요?
A. 저도 처음엔 이게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다만 존재 모드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완전히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완벽하게 구현하기는 어렵지만, 의식적으로 의도할 수 있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Q. SNS 시대에 이 책의 내용이 아직도 유효한가요?
A. 오히려 1976년 출판 당시보다 지금에 더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SNS에서는 집, 직장, 여행, 팔로워 수처럼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곧 자아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마저도 기록하고 공유하기 위해 소비하는 시대에, 프롬의 소유 모드 비판은 더욱 날카롭게 읽힙니다.
Q. 이 책이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건 아닌가요?
A. 이 지점이 프롬의 이론에서 가장 자주 제기되는 비판입니다. 충분한 물질적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존재 모드를 말하는 것은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태도 문제로 돌릴 위험이 있습니다. 프롬도 이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은 개인의 내면 성찰을 위한 도구로 쓰되 사회구조적 맥락을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
제가 행복했다고 기억하는 순간들을 되짚어보면, 무언가를 가지게 된 날보다 좋은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 날, 책을 읽다가 이전과 다른 관점을 발견한 날, 여행지에서 사진 찍는 걸 잠깐 잊고 그냥 앉아 있었던 순간들이 더 오래 남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오래 가는 것들이었습니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를 포기하라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들이 사라졌을 때 여전히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책입니다. 그 질문을 한 번쯤 진지하게 붙들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