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잘 안 풀릴 때마다 저는 항상 상대방 쪽에서 이유를 찾았습니다. 근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나서 그게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은 좋은 사람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문제라는 것. 이 책이 1956년에 나왔는데도 지금 읽어도 뜨끔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설렘의 한계 — 두근거림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프롬이 "설렘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부분에서 처음엔 좀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냐고. 근데 읽으면서 점점 수긍이 됐습니다.
프롬은 연애 초기의 두근거림을 '초보자 버프'에 가깝다고 봤습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이 단계를 리머런스(limerence)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리머런스란 상대방에 대한 강렬한 집착과 감정적 의존 상태로, 보통 수개월에서 2년 사이에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신경화학적 반응을 의미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심리학자 도로시 테노브가 1979년에 처음 명명한 개념입니다(출처: 옥스퍼드 대학교).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이 버프가 있는 동안엔 정말 뭐든 쉽습니다. 몇 시간 통화도 즐겁고,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알아서 챙기고 싶어집니다. 문제는 이게 사라진 뒤입니다. 대화가 지루해지고 데이트가 피곤하게 느껴지는 그 순간, 많은 사람이 '사랑이 식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런데 프롬이 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겁니다. 리머런스가 끝난 뒤에도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있으려는 의지, 그것이 프롬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설렘이 문제가 아니라, 설렘만을 사랑의 전부라고 여기는 태도가 문제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병리적 사랑 — 내가 그 유형이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프롬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사랑의 유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처음 읽을 땐 '저 사람 얘기네' 싶었는데, 두 번 읽으니 제 얘기였습니다.
프롬이 말하는 병리적 사랑(pathological love) — 여기서 병리적 사랑이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기대나 필요에 맞게 상대를 변형시키려는 사랑의 형태를 말합니다 — 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 숭배적 사랑 — 상대방에게 영화 속 인물 같은 완벽함을 기대하다가, 현실의 단점이 보이는 순간 급격히 실망하는 유형
- 공생적 사랑 — 한쪽이 지배하고 다른 쪽이 지배당하는 구조. 가스라이팅 관계가 여기 해당됩니다
- 감상적 사랑 — 현실의 관계보다 가상의 대상에서 감정적 대리 만족을 얻는 유형
- 투사적 사랑 — 자신의 결점은 보지 않고 상대방의 같은 결점만 집요하게 비판하는 유형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투사적 사랑은 특히 자각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우유부단하면서 상대방의 우유부단함을 답답해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제가 그러고 있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갈등의 진짜 원인은 외면한 채 표면적인 것만 계속 다투는 패턴, 돌이켜 보면 정확히 프롬이 말한 투사였습니다.
프롬은 사랑 싸움 자체를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갈등을 직면하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가 발생한다고 봤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이 표출되면서 심리적 정화와 해방감을 얻는 현상을 말합니다. 문제는 싸움이 아니라, 싸워야 할 진짜 이유를 피하면서 엉뚱한 것만 건드리는 싸움입니다.
미국심리학회(APA) 연구에 따르면, 관계 갈등의 69%는 해결되지 않는 구조적 차이에서 비롯되며, 그 차이를 회피할수록 관계 만족도가 급격히 낮아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프롬의 통찰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이유입니다.
객관적 시각 — 사랑을 지속하게 만드는 실제 능력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핵심으로 꼽은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객관적 시각, 즉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처음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솔직히 '그게 말이 되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특히 자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잘못은 상황 탓으로 돌리고 상대방의 잘못은 성격 탓으로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 편향(attribution bias)이라고 합니다. 귀인 편향이란 자신의 행동은 외부 환경 때문이고 타인의 행동은 그 사람의 내면적 특성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인지적 왜곡을 말합니다. 제가 갈등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주 생각했는데, 이게 바로 귀인 편향의 전형적인 예였습니다.
프롬은 이 능력을 하루아침에 키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읽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길러진다고 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맞는 말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당장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갈등이 생겼을 때 '잠깐, 내 쪽 잘못은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습관은 분명 생겼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싶습니다. 프롬의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메시지는 주의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관계가 노력으로 나아지는 건 아닙니다. 폭력이나 통제, 지속적인 무시가 있는 관계에서까지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해롭습니다. 저는 프롬의 핵심이 '관계를 절대 포기하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식 자체를 끊임없이 성찰하라'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 성찰 안에는 떠나야 할 때를 아는 것도 포함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사랑의 기술, 연애 경험 없는 사람도 읽을 만한가요?
A. 오히려 지금 솔로일 때 읽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프롬은 사랑을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관계가 없는 지금이야말로 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입니다.
Q. 설렘이 사라지면 그 관계는 끝난 건가요?
A. 프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리머런스라고 불리는 초기 설렘은 신경화학적 반응으로, 시간이 지나면 누구에게나 소멸됩니다. 설렘이 사라진 뒤에도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하려는 의지가 생긴다면, 그때부터가 사랑다운 사랑의 시작입니다.
Q. 투사적 사랑인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A. 상대방의 특정 행동이 유독 심하게 거슬릴 때, 저도 혹시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지 먼저 확인해보는 습관이 도움이 됩니다. 내가 비판하는 그 결점이 실은 내 안에도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불편함이 클수록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투사적 사랑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입니다.
Q. 사랑이 기술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습하나요?
A. 프롬은 독서, 타인과의 대화,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객관적 시각을 키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거창한 방법이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내 쪽 잘못은 없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작은 습관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이 반복이 쌓이면 귀인 편향을 조금씩 줄일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의 기술』을 다 읽고 나서 제가 느낀 건, 이 책이 '사랑을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꾸는 책입니다. 더 나은 사람을 찾는 것보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에 집중하라는, 단순하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완벽한 해답을 기대하고 읽으면 마지막 장이 다소 허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읽기를 권합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를 직면하게 만드는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지금 관계가 힘들다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이 책 한 번 펼쳐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