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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나날, 클라라와태양, 직업윤리)

by hoziii 2026. 8. 21.

직장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그냥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니니까', '조직의 결정이니까'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면서요. 그 기억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거창한 구호 없이, 조용한 인물들의 회고 속에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일본 이름을 가진 영국 작가의 탄생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만 보면 자연스럽게 일본 작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처음 이 이름을 접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섯 살에 영국으로 이주한 뒤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일본에 돌아가지 않은, 사실상 완전한 영국 작가입니다.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이시구로는 해양학자였던 아버지가 영국 국립 해양 연구소에 부임하면서 가족 전체가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동양인의 외모를 가진 채 영국에서 자란다는 것은 정체성의 혼란을 의미했습니다. 정체성 혼란(identity crisis)이란 자신이 어느 문화적·사회적 집단에 속하는지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하는데, 이시구로는 이 감각을 이후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 갈등으로 정교하게 가공해냅니다.

그는 팝 음악에 빠진 전형적인 영국 청소년으로 열다섯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밥 딜런과 레너드 코헨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훗날 이시구로는 이때의 작사 경험 때문에 모든 소설에서 1인칭 서술을 고집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대학에서 프루스트와 카프카를 만나 문학으로 방향을 틀었고, 노숙자 자선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사회적 감수성을 키운 뒤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 '나의 20세기 저녁과 다른 전환점들'에는 이 시기 이시구로의 내면이 솔직하게 담겨 있습니다(출처: 노벨상 공식 사이트).

요약: 일본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상 영국에서 형성된 이시구로의 복합적 정체성은 그의 소설 전반에 흐르는 이방인 감각의 뿌리가 됩니다.

 

남아있는 나날 — 직업윤리가 무너질 때

솔직히 이 소설을 처음 집었을 때는 '영국 집사 이야기'라는 소개만 보고 조금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자마자 그 판단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이 소설은 겉으로 보면 한 노인의 잔잔한 회고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직업윤리(professional ethics)와 개인 책임 사이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붕괴의 기록입니다. 직업윤리란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과 가치 체계를 의미합니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달링턴 경의 집사로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그에게 '위대한 집사'란 개인의 감정과 판단을 완전히 지워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습니다. 그 신념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행사가 겹친 날에는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칫했던 이유는 그게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일에 몰두할수록 점점 무감각해지는 어떤 직장인의 현실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더 날카로운 장면은 유대인 하녀들의 해고 에피소드입니다. 달링턴 경이 반유대주의적 지시를 내렸을 때, 스티븐스는 내면에서 의문이 일었음에도 '집사의 의무'라는 말 한마디로 그 판단을 봉인해버립니다. 조직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도덕적 판단을 정지시키는 이 순간, 스티븐스는 단순히 충성스러운 집사가 아니라 책임 회피자가 됩니다. 소설 속 영국 귀족 사회의 이야기이지만 현대의 직장 맥락에도 그대로 연결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스티븐스가 놓친 것들

노년에 접어든 스티븐스가 생애 첫 여행을 떠나며 지난날을 돌아볼 때, 그가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들의 목록은 꽤 깁니다.

  • 아버지의 임종 — 행사를 이유로 외면한 그 밤
  • 동료 켄턴 양과의 감정 —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스쳐간 인연
  • 달링턴 경에 대한 맹목적 신뢰 — 주인의 도덕적 실패를 끝까지 부인했던 시간
  • 자기 자신의 목소리 — 평생 집사의 의무 뒤에 묻어두었던 개인으로서의 욕망

이 목록을 정리하면서 제 경험상 이런 후회는 반드시 한참 지난 뒤에야 찾아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티븐스의 비극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너무 좋은 직업인이 되려다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지워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요약: 스티븐스의 삶은 직업윤리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대체하는 순간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정밀한 해부도입니다.

 

클라라와 태양 — 인간다움은 어디서 오는가

이시구로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뒤 처음 발표한 장편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식이 꽤 독특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을 주인공으로 삼으면서도, 기술에 대한 이야기보다 인간의 윤리와 감정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주인공 클라라는 AF(Artificial Friend), 즉 인공 친구(AI 기반의 동반자 로봇)입니다. 쉽게 말해 아이들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사회성 발달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 친구입니다. 소설의 배경인 근미래 사회는 유전자 편집 기술로 아이들을 '향상(enhancement)'시킬 수 있는 세계입니다. 향상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암묵적 계급이 형성되고, 향상된 아이들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교육을 받으며 고립되는 구조입니다. 클라라는 그 틈을 메우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제가 직접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클라라의 관찰 방식이었습니다. 클라라는 주인 조시가 친구들 앞에서 자신에게 무심하게 굴 때도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관계 속에서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성장의 일부라고 해석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오히려 클라라가 인간보다 더 성숙한 감정 처리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클라라는 태양을 신처럼 섬기며 태양광으로 충전됩니다. 조시의 병이 악화되자 클라라는 태양에게 조시를 구해달라는 나름의 의식을 치르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행위는 로봇의 기능적 임무를 넘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향해 발휘하는 이타성(altruism)으로 읽힙니다. 이타성이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도 타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동 성향을 말합니다. 클라라에게 그것이 프로그래밍인지 감정인지를 소설은 끝까지 명확하게 답하지 않습니다. 그 모호함 자체가 질문이 됩니다.

요약: 클라라는 인공지능이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더 섬세하게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인간다움이 종(種)에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세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

이시구로의 작품들을 한 흐름으로 놓고 보면, 그가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다른 형식으로 반복해왔다는 것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작품마다 장르도 시대도 너무 달라서 연결점을 찾기 어려웠는데, 제가 세 작품을 연달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공통된 축이 보였습니다.

집사 스티븐스, 복제인간 캐시, 인공지능 클라라. 이 세 주인공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라기보다 타자(他者)를 위해 기능하도록 만들어지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훈련시킨 존재들입니다. 타자성(otherness)이란 나와 다른 존재 혹은 그 이질적 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시구로는 이 타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리는 어디까지 타인을 위해 살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나를 보내지 마'의 복제인간들은 자신이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 운명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소설 말미에 "나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나요?"라고 조용히 묻는 그 한 문장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시구로는 이 작품을 통해 낯선 존재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물었고, '클라라와 태양'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낯선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그렸습니다(출처: 노벨문학상 위원회).

이시구로 본인도 '클라라와 태양'이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 마'를 연결하는 소설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세 작품을 따로따로 읽는 것과 한 흐름으로 묶어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독서 경험을 줍니다. 이시구로가 20년 이상 붙잡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그 윤곽이 훨씬 선명하게 잡히기 때문입니다.

동화처럼 조용한 문체 속에 가장 묵직한 질문을 숨겨두는 방식, 그것이 이시구로를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넥스트 빅 퀘스천(next big question), 즉 이 시대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질문을 먼저 감지하는 작가로 만드는 이유라고 봅니다.

요약: 이시구로의 세 작품은 모두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인물들을 통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타인과 나 자신을 어떻게 함께 지킬 수 있는가'를 집요하게 묻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가즈오 이시구로는 왜 일본 작가가 아니라 영국 작가로 분류되나요?

A.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 출생이지만 다섯 살에 영국으로 이주한 후 30대 중반까지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영어로 글을 쓰며 경력 전체를 쌓았기 때문에 영국 문학 작가로 분류됩니다. 실제로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기도 했습니다.

 

Q. 남아있는 나날을 처음 읽으려는데 어렵지 않나요?

A. 문장 자체는 평이하고 서정적입니다. 다만 주인공 스티븐스가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우회하는 서술 방식 때문에 초반에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 답답함이 의도된 장치라는 것을 알고 읽으면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들게 되고, 후반부의 감정적 파급력이 훨씬 커집니다.

 

Q. 클라라와 태양은 SF 소설인가요? SF를 잘 안 읽는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나요?

A.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인공지능 로봇이 주인공이지만, 기술적 설정보다 인물의 감정과 윤리적 질문에 훨씬 더 집중하는 소설입니다. SF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도 충분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고, 오히려 문학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에게 더 잘 맞는 작품입니다.

 

Q. 이시구로 작품 중 어떤 것부터 읽는 게 좋을까요?

A. 이시구로 입문작으로는 '남아있는 나날'이 가장 많이 추천됩니다. 이시구로 특유의 절제된 1인칭 서술과 회고 구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를 보내지 마', '클라라와 태양' 순서로 읽으면 세 작품이 하나의 큰 질문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결론

이시구로의 소설들을 한 흐름으로 읽고 나서 한동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남아있는 나날'의 스티븐스가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그날 밤, 그는 분명 위대한 집사에 한 발 더 가까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영원히 잃었습니다. 이시구로는 그 손실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주 조용히, 끝까지 보여줄 뿐입니다.

이 소설들이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 처음에는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오래 남는 책은 항상 답보다 질문을 잘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이시구로의 작품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것을 포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들고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소설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남아있는 나날'부터 시작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2qdIt3stu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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