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은중과 상연 (비선형 서사, 복합 감정, 조력사망)

by hoziii 2026. 8. 1.

드라마를 고르다가 "우정 이야기"라는 소개에 끌렸는데, 막상 보고 나면 그게 얼마나 단순한 설명이었는지 알게 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서로를 가장 좋아하면서도 가장 잔인하게 상처 줄 수 있는 두 친구, 류은중과 천상연의 이야기를 보며 제가 직접 겪었던 오래된 관계들이 자꾸 겹쳐 보였습니다.

 

비선형 서사가 만들어낸 심리 미스터리

이 드라마는 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직선으로 밀고 나가지 않습니다. 1992년 열한 살의 교실 장면이 나오다가, 대학 시절 자취방으로 훌쩍 넘어가고, 다시 42살의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걸 비선형 서사(Non-linear Narrative)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시간 순서를 뒤섞어가며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성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따라가기 버거울 수 있는데, 익숙해지고 나면 오히려 이 구조가 이 작품의 핵심 장치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과거 장면 하나가 공개될 때마다 현재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점이었습니다. 은중이 상연의 월세를 대신 내는 장면이 처음엔 그냥 친절함처럼 보였는데, 두 사람의 어린 시절 관계를 알고 나면 그 안에 미안함과 죄책감과 연민이 모두 뒤엉켜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동기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저는 마치 심리 미스터리를 푸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 고증도 꽤 공들인 흔적이 보였습니다. 1992년 전학원 교실, 1990년대 후반 하이텔·나우누리 같은 PC 통신 문화, 2000년대 초 자취방 분위기까지 시대별로 의상과 소품이 달랐고, 무엇보다 인물들이 서로를 대하는 말투와 태도가 달라지는 게 보였습니다. 열한 살 때 상연이 "억울하면 너도 때려"라며 리코더를 내밀던 장면과, 42살의 상연이 무릎 꿇고 "엄마랑 오빠한테는 미안하다고 못 했는데 넌 살아 있으니까"라고 말하는 장면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긴 시간을 품고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천상학의 이야기는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을 이해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성 정체성이란 자신이 어떤 성별로 느끼고 인식하는지에 관한 내면의 감각을 의미합니다. 드라마는 이 부분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살아남은 가족들이 뒤늦게야 그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조용히 다룹니다. 상연이 "오빠가 아니라 언니가 있었구나"라고 오열하는 장면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게 남았습니다.

  • 비선형 서사: 시간을 오가며 같은 장면을 다른 의미로 재해석하게 만드는 구성
  • 각 시대별 의상·소품·말투 변화로 시대감을 살린 세밀한 연출
  • 성 정체성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가족의 이해 과정으로 풀어낸 점
  • 과거 사건이 공개될 때마다 현재 인물의 행동이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읽힘
요약: 비선형 서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물의 행동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구성이 이 드라마의 핵심 장치입니다.

 

복합 감정의 우정, 그리고 조력사망이라는 결말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우정 드라마"라는 소개를 보고 들어갔는데, 두 사람 사이에 로맨스 갈등, 즉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상황이 꽤 긴 비중을 차지합니다. 은중과 상연이 모두 김상학을 좋아하면서 서로를 경쟁자로 바라보는 전개가 이어질 때, 제 경험상 이 부분이 가장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여성의 복잡한 우정이 연애 문제로 좁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드라마가 진짜 하려는 말은 그 너머에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방식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는 걸, 각자가 품고 온 결핍과 죄책감에서 비롯된다는 걸 보여주는 데 집중합니다. 상연은 오빠의 일기장을 엄마에게 보여준 것이 오빠의 죽음을 불렀다는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고, 은중은 친구를 의심하며 서랍장을 뒤져 일기장을 훔쳐봤다는 수치심을 10년 넘게 안고 있었습니다. 이걸 알고 나면 두 사람의 절교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는 개념이 있는데,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상대가 실제로 그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무의식적 방어 기제를 말합니다. 상연이 은중을 "망가뜨리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이 개념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신이 이미 망가져 있다는 감각을 은중에게 옮기려 했던 거죠.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불편했던 이유는, 그 논리가 이해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결말에서 상연은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조력사망(Assisted Dying)을 선택합니다. 조력사망이란 스스로 삶을 끝내고자 하는 의사를 밝힌 환자에게 의료진이나 제3자가 그 과정을 돕는 것을 의미하며, 현재 스위스,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에서만 법적으로 허용된 제도입니다(출처: 스위스 조력사망 기관 Dignitas). 드라마 속 상연이 스위스를 선택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합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식입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은중이 이 부탁을 처음에 거절했다가 결국 함께 가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드라마의 마지막 축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결말은 쉽게 감동으로 소비되기 쉬운데, 이 드라마는 그렇게 놔두지 않습니다. 은중은 혼자 돌아올 길에 대한 결심이 서지 않으면서도, 친구가 "보통을 거절할 권리"를 갖고 싶다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상연의 사과가 병 때문에 모든 잘못이 용서받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 은중도 자신이 했던 잔인한 말을 돌아봐야 했다는 점이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요약: 로맨스 갈등이라는 외피 안에 죄책감과 결핍에서 비롯된 복합 감정의 우정이 있고, 조력사망이라는 결말을 통해 서로를 끝내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끝내 받아주는 사람은 로맨스 드라마인가요, 우정 드라마인가요?

A. 기본 뼈대는 두 여성의 우정 이야기입니다. 다만 두 사람이 같은 인물을 좋아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로맨스 관련 전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우정을 기대하고 보시되, 연애 감정이 얽히는 전개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시작하시는 게 편할 것 같습니다.

 

Q. 조력사망 내용이 나오는데 너무 무겁지 않나요?

A. 소재가 무거운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가 이 부분을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병의 고통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채로 죽고 싶다"는 상연의 말에 집중하면서, 이 선택을 미화하거나 부추기는 방식이 아닌 두 친구의 화해 과정으로 풀어갑니다. 단, 이런 소재에 예민하신 분이라면 심리적 여유가 있을 때 보시길 권합니다.

 

Q. 시간대가 자꾸 바뀌어서 헷갈리지 않나요?

A. 처음 2~3화는 시간 흐름을 따라가는 데 에너지가 좀 필요합니다. 제 경험상 각 시대별 의상과 공간이 꽤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조금 익숙해지면 오히려 이 구조가 재미있어집니다. 인물의 현재 행동이 왜 그런지 과거가 공개될수록 이해되는 방식이라 끝까지 보면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Q.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상연은 결국 생을 마칩니다. 그래서 보편적인 의미의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를 끝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보고 나면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결말입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결론

이 드라마를 보고 난 뒤 제가 계속 생각했던 건, 누군가를 정말 오래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을 잘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은중과 상연은 30년 가까이 서로를 알면서도, 상대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가 찾아왔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건강한 우정이 아니라, 사랑과 질투와 동경과 원망이 한꺼번에 뒤섞인 관계가 어떻게 수용으로 나아가는지를 보고 싶은 분께 권합니다. 단, 결말의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됐을 때 보시는 게 좋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드라마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 보면 생각보다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uiXn0M0N3do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