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잔혹한 데스게임 장르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게임 안보다 게임 밖 현실이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참가자들이 목숨이 오가는 공간에서 나왔다가 다시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제가 직접 겪어온 어떤 순간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드라마가 단순한 서바이벌물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공정의 허상 — 오징어 게임은 처음부터 불공정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규칙 아래에서 경쟁하면 공정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이 드라마를 다시 뜯어보니 오징어 게임은 단 한 번도 공정하게 진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주최 측은 게임 내내 '평등한 기회 부여'를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평등한 기회 부여란, 모든 참가자에게 동일한 규칙과 동일한 상금 획득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실제 게임 구조를 보면 이 원칙은 철저히 위장에 불과했습니다.
뽑기 게임에서 일부 참가자는 사전에 어떤 도형을 골라야 유리한지 정보를 미리 얻었습니다.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는 VIP들의 내기를 위해 조명이 꺼지는 방식으로 게임 환경이 직접 개입됐습니다. 구슬치기 게임에서는 사전에 예고 없던 '깍두기' 규칙이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깍두기 규칙이란, 홀수 팀 구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주최 측이 즉흥적으로 끼워 넣은 변칙 조항을 의미합니다.
제가 경험상 가장 인상 깊었던 불공정은 따로 있었습니다. 오일남이라는 존재 자체입니다. 게임을 직접 설계한 호스트가 참가자 번호 1번을 달고 게임에 뛰어들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공정이라는 단어는 그 자리에서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인지했을 때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오일남을 그냥 나이 든 참가자 중 한 명으로만 봤으니까요.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여섯 개 게임의 불공정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탈락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리지 않음
- 뽑기 — 사전 정보를 가진 참가자와 그렇지 못한 참가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 존재
- 줄다리기 — 처음으로 참가자끼리 직접 상대를 탈락시켜야 하는 구조로 전환
- 구슬치기 — 예고 없는 규칙 변경, 파트너를 선택하는 순간 이미 승부의 틀이 결정됨
- 징검다리 — VIP 내기를 위한 외부 개입으로 게임 조건이 임의로 변경됨
- 오징어 게임 — 앞선 다섯 게임의 불공정 구조가 모두 중첩된 최종 게임
이 구조에서 제가 가장 불편했던 지점은, 참가자들이 처음에는 주최 측에 분노를 쏟다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원망을 돌린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결과가 결정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출발선과 정보, 자원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같은 규칙 아래 세운다고 해서 경쟁이 공정해지지는 않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그 불편한 진실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한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출처: Netflix 오징어 게임 공식 페이지).
인간성의 붕괴와 만원의 상징 — 기훈이 끝까지 쥐고 있던 것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를 도덕적 이탈(moral disengage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도덕적 이탈이란, 극단적인 압박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비윤리적 선택을 내리는 심리 메커니즘입니다. 상우가 알리를 속이는 장면, 69번 참가자가 배우자를 희생시키는 장면이 그 전형입니다. 이 장면들이 충격적이면서도 완전히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경쟁이 극단화될수록 우리도 바로 옆 사람을 원망하게 된다는 걸 어느 정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기훈이 드라마 전반에 걸쳐 만원을 매개로 행동하는 방식은 굉장히 의미 있게 읽혔습니다. 제 경험상 작은 디테일 하나가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데, 기훈에게는 그게 바로 만원이었습니다.
그는 경마장에서 상금 일부를 직원에게 팁으로 건네고, 상우 엄마에게 만원에 고등어를 받고, 우승 후에도 통장에서 딱 만원만 꺼냈습니다. 일반적으로 456억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돈을 쓰는 방식이 달라질 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돈의 액수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손에 쥐고 다니는지가 본성을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기훈에게 만원은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인정이자 인간미의 마지노선이었습니다.
오일남과 기훈의 마지막 내기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오일남이 던진 질문, "아직도 사람을 믿나?"는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질문입니다. 서사 구조론(narrative structure)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은 작품의 핵심 갈등을 최종적으로 명시화하는 장치입니다. 서사 구조론이란, 이야기의 전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주제 의식을 분석하는 문학 연구 방법론입니다.
기훈이 끝내 빨간 머리를 하고 게임을 설계한 쪽에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도, 단순한 복수 선언이 아니라 읽혔습니다. 감독 황동혁은 이 빨간 머리에 대해 "기훈의 분노 같은 것"이라고 직접 코멘트했습니다. 제가 직접 감독 인터뷰를 찾아봤을 때 이 표현이 가장 와닿았습니다. 파란 딱지를 들고 시작했던 참가자가 빨간 딱지를 쥔 주최자의 위치로 이동하려 한다는 설정, 색채 상징 하나로 이렇게 많은 걸 담아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출처: BBC 코리아 오징어 게임 심층 리뷰).
다만 기훈을 완전히 선한 인물로 보는 해석에는 제 경험상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도 게임 안에서 거짓말을 하고 상대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던지는 질문은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라,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설계된 환경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한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훈의 마지막 태도는 그 질문에 대한 조심스러운 답이라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현실로 나왔다가 다시 게임으로 돌아간 이유가 뭔가요?
A.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가 보기엔 그 선택지가 처음부터 극도로 제한된 상황이었습니다. 막대한 빚, 가족의 생계, 사회적 고립이 이미 모든 다른 출구를 막아버린 상태에서 게임으로 돌아가는 건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통로에 가까웠습니다. 오일남도 참가자들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투표로 게임을 멈춘 것이었습니다.
Q. 오일남이 참가자로 게임에 참가한 이유가 뭔가요?
A. 돈이 너무 많아지면 모든 것이 시시해진다는 심리에서 비롯됐습니다. 오일남은 게임의 설계자이자 호스트였지만, 세트 안에서 규칙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재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직접 참가자 속에 섞여 공포와 흥분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는 그가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하늘을 보며 미소 짓는 장면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됩니다.
Q. 기훈이 우승 후 상금을 오랫동안 쓰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A. 상금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 특히 상우와 새벽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제가 보기엔 그것이 단순한 트라우마가 아니라, 456억이라는 숫자가 그에게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통장에서 딱 만원만 꺼낸 장면은 그 무게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연출이었습니다.
Q. 상우가 마지막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진짜 이유가 뭔가요?
A. 여러 해석이 있지만, 제가 직접 장면들을 다시 보고 내린 결론은 엄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배팅이었다는 것입니다. 상우는 자신이 이기든 지든 기훈이 살아남아야 상금이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기훈이 상금으로 엄마를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누적된 죄책감도 작용했겠지만, 그것보다 엄마의 집과 가게를 저당 잡힌 현실이 그의 선택을 결정했다고 봅니다.
결론
오징어 게임은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촘촘하게 설계된 작품이었습니다. 색깔 하나, 소품 하나, 게임의 순서 하나가 모두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인간성을 포기하도록 설계된 환경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한가."
다만 모든 장면을 하나의 사회적 상징으로 단정 짓는 해석은 조심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가진 감정의 결과 모호함이 그런 단선적 독해 속에서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시즌 2가 공개된 지금, 기훈이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는 이유를 시즌 1의 이 질문과 연결해서 보면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읽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