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처음 《프렌치 디스패치》를 극장에서 봤을 때 "이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었습니다. 화면은 분명히 아름다웠고, 배우들도 훌륭했는데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뭔가를 잔뜩 흘리고 나온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찜찜함이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고, 결국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웨스 앤더슨이 설계한 이 영화의 구조가 정확히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저널리즘 영화처럼 보이는 이유
《프렌치 디스패치》를 처음 접하면 저널리즘 영화처럼 읽힙니다. 잡지사가 배경이고, 기자들이 주인공이고, 편집장의 죽음으로 마지막 호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니까요. 실제로 이 영화는 실존 잡지인 《뉴요커》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웨스 앤더슨이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뉴요커》 표지에 반해 탐독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잡지를 끼고 다니며 세상을 배우던 감각이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영화 속 가상의 도시 '앙리 쉬르 블라제(Ennui-sur-Blasé)'라는 이름부터 그냥 넘기기 아깝습니다. 프랑스어로 '앙리(ennui)'는 권태, '블라제(blasé)'는 무관심 혹은 냉담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권태 강가의 냉담 마을' 정도가 되는 셈인데, 웨스 앤더슨이 이 이름을 그냥 붙였을 리는 없겠죠. 실제로 영화 속 이 도시는 일주일에 8.25구의 시체가 강을 떠내려오고, 지하철에는 쥐 떼가 들끓고, 아이들이 술에 취해 어른을 구타하는 곳입니다. 낭만과는 거리가 한참 먼 도시인데, 영화는 이 도시를 지극히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이 영화 전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도시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 도시의 비밀처럼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글로 쓴 저널리스트 때문에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저널리즘 자체를 예찬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행위, 즉 창작이라는 더 넓은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자도, 화가도, 요리사도 모두 같은 테두리 안에 있는 예술가로 보는 시각이 영화 전체에 깔려 있거든요.
- 《프렌치 디스패치》는 실존 잡지 《뉴요커》의 실제 아티클들을 변형한 세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됩니다 (출처: The New Yorker)
- 가상 도시 앙리 쉬르 블라제는 표면상 퇴락하고 혼란스러운 곳이지만, 영화는 이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 영화 속 편집장 아서 하위치(빌 머레이)는 50년간 잡지를 만들었고, 잡지는 50개국에서 50만 부 판매됩니다
- 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를 연출 당시 만 50세였으며, 이 숫자는 의도적인 자기 투영으로 읽힙니다
흑백과 컬러, 웨스 앤더슨이 숨긴 진짜 규칙
처음 볼 때는 흑백과 컬러가 번갈아 나오는 게 단순히 시대적 감각이나 미장센(mise-en-scène)의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여기서 미장센이란 카메라 앞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세트·의상·배우의 위치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몇 번 더 들여다보니 단순한 스타일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영화에서 흑백으로 처리된 장면은 대부분 사건 자체, 즉 메인 스토리입니다. 감옥에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 68혁명의 현장, 납치 사건의 추적까지 모두 흑백입니다. 반면 컬러로 찍힌 장면들은 의외로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기자의 장면입니다. 틸다 스윈튼이 청중 앞에서 강연하는 장면,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자신의 취재 경험을 회고하는 장면처럼요. 얼핏 보면 정적이고 밋밋한 이 장면들이 오히려 색을 얻은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대담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는 파란만장한 사건을 컬러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흑백으로 찍을 것 같은데 웨스 앤더슨은 정반대를 택했습니다. 이야기보다 이야기하는 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새긴 거죠. 그리고 흑백 장면 안에서 드물게 컬러가 살아나는 순간은 대부분 예술 작품이 직접 등장할 때입니다. 죄수 화가의 그림이 화면을 채우는 순간, 흑백 화면이 갑자기 빛을 받습니다. 잡지의 긴 활자 사이에 삽화 한 장이 껴 있을 때 시선이 머무는 것과 똑같은 감각입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트래킹 쇼트(tracking shot)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트래킹 쇼트란 카메라가 인물이나 공간을 향해 직접 달려들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촬영 방식입니다. 폭동이나 전시회 소란처럼 동적인 장면조차 인물들이 정지된 연기로 표현되고, 카메라는 그 앞을 만화 칸처럼 스르르 지나갑니다. 이게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결국 이 영화 전체가 잡지 한 권을 천천히 넘기는 감각을 영상으로 구현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세 에피소드 다시 읽기
세 편의 에피소드를 각각 독립된 이야기로 읽으면 이 영화가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세 이야기의 공통 질문이 하나라는 걸 알면 달라집니다. "예술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화가 모제스 로젠탈러(베니치오 델 토로)는 감옥 취미실의 벽 자체에 그림을 그려버립니다. 미술상 줄리앙 카다치오는 벽에 그린 그림은 팔 수 없다며 분노하죠. 여기서 충돌하는 두 시각은 예술과 세계를 분리하려는 입장과, 예술이 세계 자체에 달라붙어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결국 그 취미실은 콘크리트째 통째로 떼어내져 비행기로 운반됩니다. 세계와 완전히 결합된 예술이 세계 자체를 이동시키는 것이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기자 루신다 크레멘츠(프란시스 맥도먼드)는 68혁명을 취재하면서 처음엔 "관찰자로만 있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결국 혁명의 지도자 젤피렐리(티모시 샬라메)와 사랑을 나누고, 그의 성명서 초안까지 직접 고쳐줍니다. 예술가는 세계와 분리된 채 냉정하게 기록한다는 이상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이 에피소드가 보여줍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요리사 네스카피에르(스티브 박)는 이방인으로서 차별받는 위치에서도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결국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독이 든 음식을 먹습니다. 이 장면에서 요리사는 "맹독성 소금의 맛은 생전 처음 맛보는 풍미였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새로운 맛을 발견한 것입니다. 기자 로박(제프리 라이트)은 이 고백을 듣고 깊이 감동받아 편집장에게 전합니다. 평소 잡지사 내에 '눈물 금지(No Crying)'라는 철칙을 붙여놓을 정도로 냉정했던 편집장 아서 하위치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감정에 흔들립니다. 그리고 곧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납니다. 죽음의 풍미에 공명한 자가 직접 죽음을 맞이하는 구조입니다.
이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이방인으로서의 예술가상입니다. 타향에 뿌리내리지 못한 채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그리워하면서도 멈추지 않고 창작하는 사람, 웨스 앤더슨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바로 그 형상입니다. 영화 속 구조 자체도 이를 따라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고의 첫 문장 "모든 것은 휴가에서 시작되었다"가 쓰이는 순간, 영화는 그 문장이 등장했던 첫 장면으로 되돌아가는 순환 구조를 완성합니다. 이 영화는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됩니다. 아서 하위치의 삶이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처럼요. 웨스 앤더슨이 이 구조 안에 자신을 얼마나 깊이 투영했는지, 실제로 영화를 만든 그의 나이가 정확히 50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출처: IMDb, The French Dispatch).
자주 묻는 질문
Q. 프렌치 디스패치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뭔가요?
A. 단위 시간당 정보량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대사량 자체가 방대한 데다 5부 구성으로 등장인물이 계속 바뀌고, 배경 지식이 없으면 지레 겁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모델이 된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몰라도 영화의 핵심인 예술과 창작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Q. 흑백 장면과 컬러 장면을 구분하는 기준이 뭔가요?
A. 단순히 시대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사건 자체는 흑백,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기자의 장면은 컬러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예술 작품이 직접 등장하는 순간에도 흑백 안에서 컬러가 살아납니다. 이야기보다 이야기하는 자를 더 중요하게 본 감독의 의도가 시각 언어로 새겨진 것입니다.
Q. 웨스 앤더슨의 다른 영화를 먼저 봐야 이 영화를 즐길 수 있나요?
A.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먼저 보면 훨씬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습니다. 두 영화는 내용상 전혀 이어지지 않지만, 유럽의 특정 시대를 향수 어린 감각으로 바라보는 태도와 특정 직장을 주요 무대로 삼는 구조가 매우 닮아 있어 사실상 2부작처럼 느껴집니다.
Q. 영화 속 편집장 아서 하위치가 웨스 앤더슨 자신이라는 해석은 근거가 있나요?
A.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여러 정황이 그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편집장이 잡지를 만드는 방식, 즉 뛰어난 필자들을 모아 지시하고 편집해 한 권을 완성하는 과정이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정확히 겹칩니다. 게다가 영화 제작 당시 웨스 앤더슨의 나이가 50세였고, 편집장의 재직 기간도 50년이라는 점은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결론
《프렌치 디스패치》는 한 번 보고 다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영화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고, 솔직히 지금도 모든 장면을 완전히 소화했다고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방식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나서 훨씬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결국 하나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아름답게 기억된다는 것. 그 사람이 기자든, 화가든, 요리사든, 혹은 영화감독이든,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한 번 보고 어렵게 느껴졌다면, 다시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는 분명히 처음과 다른 페이지가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