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틀었다가 영화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2017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1983년 이탈리아 북부 별장을 배경으로, 열일곱 살 소년 엘리오가 아버지의 여름 손님 올리버를 만나 감정의 문이 열리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보는 내내 가슴이 조여들었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들어내는 감각
일반적으로 로맨스 영화라고 하면 극적인 고백 장면이나 갈등의 화해를 먼저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감정을 쌓아 올립니다.
영화의 배경은 1983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여름 별장입니다. 고고학자인 아버지가 매해 여름 자신의 연구를 도울 대학원생을 집으로 초청하는데, 그해 여름의 손님이 바로 미국인 올리버입니다. 하늘색 셔츠를 입고 택시에서 내리는 그 첫 장면부터,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보통 영화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미장센(mise-en-scène)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배경, 인물의 위치와 움직임이 하나의 감정을 만들어내는 연출 기법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따뜻하게 쏟아지는 햇살, 낡은 별장의 질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비포장 길, 물속에서 가볍게 장난치는 장면들이 모두 그 역할을 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이탈리아 어딘가의 그 별장에서 한 계절을 함께 보내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음악도 그 감각의 일부입니다. 수프얀 스티븐스의 곡들이 흐를 때마다 여름이 끝나가는 아쉬움과 사랑이 시작되는 두근거림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피아노와 기타 연주를 즐기는 엘리오의 캐릭터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어서, 음악이 배경음이 아닌 인물 그 자체처럼 들렸습니다.
첫사랑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
첫사랑은 처음 좋아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첫사랑이란 한 사람으로 인해 자신의 내면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엘리오가 올리버를 처음 대하는 방식이 그걸 잘 보여줍니다. 올리버가 어깨에 손을 얹자 몸이 굳어버리고, 이유도 모른 채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일부러 차갑게 대하면서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끊임없이 신경 씁니다. 발코니에서 걸어가는 올리버를 내려다보고, 그의 방 앞에서 서성이다 인기척이 들리면 자기 방으로 달려가 책을 읽는 척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싫어서가 아닙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신경 쓰여서 생기는 반응입니다.
영화는 이 감정을 내러티브 경제(narrative economy)라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내러티브 경제란 대사나 설명 없이 최소한의 장면으로 최대한의 감정을 전달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엘리오가 시계를 확인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올리버와 자정에 만나기로 한 그날, 마르치아와 함께 있을 때도, 손님들을 위해 피아노를 칠 때도, 그는 쉬지 않고 시계를 바라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단 한 줄도 없지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올리버의 셔츠를 입고 마당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준 선물 옷은 조금 크다는 이유로 입지 않겠다고 아버지와 실랑이를 벌이면서, 올리버의 셔츠는 펄럭일 정도로 크지만 기분 좋게 입고 뛰어다닙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제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 올리버를 향한 불편함 → 실은 거절당할 두려움에서 비롯된 방어 반응
- 시계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장면 → 대사 없이 설레는 기다림을 표현
- 올리버의 셔츠를 기꺼이 입는 장면 → 영화 속 가장 솔직한 감정 고백
- 유대인 표식 목걸이를 걸기 시작하는 엘리오 → 정체성과 연결의 상징적 표현
엔딩이 말하는 것, 여름 이후의 이야기
이 영화가 단순한 여름 로맨스로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엔딩 때문입니다. 올리버를 연기한 아미 해머 본인도 인터뷰에서 엔딩 씬을 영화 전체의 베스트 씬으로 꼽았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풀지 않겠습니다.
대신 엔딩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름이 지나면 올리버는 이탈리아를 떠납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여름이 끝난 뒤에도 이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이 엘리오에게 어떤 사람이 되게 하는가. 영화는 그 질문을 열어둔 채 끝납니다.
페르소나(persona)의 관점에서 보면 흥미롭습니다. 페르소나란 한 사람이 외부에 드러내는 사회적 가면, 즉 타인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뜻합니다. 엘리오는 영화 내내 도도하고 무관심한 페르소나를 유지하려 하지만, 올리버 앞에서는 그 가면이 하나씩 벗겨집니다. 이 과정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넘어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일반적으로 퀴어 영화는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과 사회적 시선을 중심에 놓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영화는 그 무게를 의도적으로 걷어냅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거나 규정하는 대신, 그 감정 자체의 순도에만 집중합니다. 출처: Roger Ebert 리뷰에서도 이 영화를 "감정의 기억을 촉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라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티모시 샬라메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둘이었고,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후보 세 번째 기록이었습니다. 출처: IMDb - Call Me by Your Name에 따르면 영화는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원작 소설과 영화 중 뭘 먼저 봐야 하나요?
A. 일반적으로는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야 영화가 더 풍성하게 보인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는 쪽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영화가 남긴 여운을 소설이 더 깊은 곳까지 채워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설은 앙드레 애시먼이 쓴 동명 원작으로, 엘리오의 내면 독백이 훨씬 상세하게 담겨 있습니다.
Q. 영화가 느리고 지루하다는 말이 있던데, 실제로 어떤가요?
A. 뚜렷한 사건 전개를 기대하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의견은 사실입니다. 이 영화는 132분 러닝타임 동안 큰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보는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춰야 합니다. 화면 속 햇빛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느림 자체가 이 영화의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Q. 티모시 샬라메가 이 영화에서 직접 연주한 건가요?
A. 네, 맞습니다. 티모시 샬라메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영화 속 연주 장면은 실제로 직접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장면이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그 순간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Q. 영화 제목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무슨 의미인가요?
A. 영화 안에서 올리버가 엘리오에게 "나를 네 이름으로 불러, 나는 너를 내 이름으로 부를게"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로의 이름을 교환한다는 것은 단순한 애칭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이 영화가 왜 제목을 이렇게 지었는지 단번에 이해됐습니다.
결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여름이라는 계절이 가진 나른함과 예민함을 가장 잘 포착한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 사람이 얼마나 섬세해지고, 얼마나 솔직해지며, 동시에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대사 없이 보여줍니다. 처음엔 지루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볼 때마다 다른 장면에서 마음이 걸립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여름에 보시길 권합니다. 낮보다는 저녁 이후, 혼자서, 조용한 곳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엔딩 장면까지 자리를 지키시면, 왜 이 영화가 오래도록 기억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