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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블랙코미디, 혁명과 가족, PTA)

by hoziii 2026. 8. 28.

혁명을 다룬 영화라면 당연히 혁명이 멋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극장 문을 열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베니치오 델 토로가 한 스크린에 모인 것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했는데, 막상 보고 나니 배우 이름값보다 훨씬 무거운 것들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한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결국 더 오래 남더라고요.

 

블랙코미디인데 왜 이렇게 쓴맛이 남을까

영화는 이민자 구금소 습격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무장한 저항 조직 프렌치 75가 시설을 급습해 억류된 이민자들을 풀어주는 시퀀스인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분명 블랙코미디라고 분류되는 영화인데 초반 30분은 전혀 웃기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었습니다.

프렌치 75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이 조직의 성격을 압축하고 있습니다. 프렌치 75(French 75)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운용한 75mm 야포로, 빠르고 정확한 타격으로 유명했던 무기입니다. 즉, 조직 이름부터가 격렬하고 목적 지향적인 무력 저항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죠. 문제는 그 이름처럼 강력해 보이던 조직이 결국 내부 배신과 자멸로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퍼피디아가 체포된 뒤 동료를 밀고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여기서 영화는 코인텔프로(COINTELPRO)를 은근히 끌어옵니다. 코인텔프로란 1956년부터 1971년까지 미국 FBI가 운용한 방첩 프로그램으로, 흑인 민권 운동과 급진 세력을 조직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내부 분열, 협박, 허위 정보 유포 등을 동원한 공작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백인 여성 활동가와 흑인 여성 활동가가 같은 혐의로 전혀 다른 형량을 받는 경우가 빈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출처: FBI 공식 아카이브 COINTELPRO 문서). 영화 속 대사 "흑인 여자는 특히 안 봐줘"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악당의 말이 아니라 역사의 주석처럼 들렸던 이유입니다.

이렇게 무거운 팩트를 깔면서도 영화가 블랙코미디의 리듬을 잃지 않는 게 신기했습니다. 설교하지 않고, 관객을 시험하지 않으면서 계속 다음 장면이 궁금하게 만들더라고요.

  • 프렌치 75: 혁명을 꿈꾸지만 내부 배신과 폭력으로 자멸하는 급진 조직
  • 코인텔프로: 실존했던 FBI의 급진 세력 무력화 공작, 인종·성별에 따라 처벌이 달랐던 역사
  •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보헤미안 그로브(Bohemian Grove)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권력층 비밀 사교 조직
요약: 블랙코미디의 외피 안에 미국 현대사의 실제 공작과 인종 불평등의 역사를 촘촘히 박아 넣은 것이 이 영화의 첫 번째 층위입니다.

 

혁명과 가족, 어느 쪽이 더 강한가

16년이 흐른 뒤 등장하는 밥은 제가 예상했던 혁명가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술독에 빠져 있고, 가명으로 숨어 살며, 딸 윌라를 홀로 키우는 초라한 중년 남자입니다. 화약 전문가로서 항상 현장 바깥에서 뇌관을 설계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혁명의 불꽃 속에서 고함 지르는 장면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이 이 캐릭터의 핵심이라고 봤습니다.

반면 숀 펜이 연기하는 록조는 겉으로는 강인한 남성성과 권위를 과시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인물입니다.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입회를 목전에 두고 자신의 과거를 지우려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오히려 그 불안을 드러냅니다. 개인적으로는 록조가 면접에서 "역으로 시도둑질을 당했다"는 식으로 발언하는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아이러니였습니다. 폭력과 권위로 모든 것을 지배해 온 인물이 정작 자신을 피해자라고 규정하는 그 순간, 그가 집착해 온 모든 가치가 한꺼번에 무너지거든요.

윌라가 아버지의 동료를 따라나서는 장면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혔습니다. 윌라는 암호가 맞아서가 아니라, 그 암호를 말한 사람을 믿으라고 했던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따라갑니다. 이게 단순한 부녀 관계의 신뢰처럼 보이지만,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이념과 조직이 개인보다 앞서는 순간 얼마나 쉽게 폭력적으로 변하는지를 보여준 뒤 그 반대편에 놓인 답으로 기능합니다.

보헤미안 그로브(Bohemian Grove)는 캘리포니아 북부 삼림 지대에 실제로 존재하는 비밀 클럽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과 재계·언론계 권력자들이 모여 자체적인 의식을 치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Bohemian Club 공식 사이트). 영화 속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입회 조건에 "유색 인종 불가, 유대인 아닌 미국인 가정 출신"이라는 항목이 명시된 것은 이런 실존 조직의 구조를 직접 겨냥한 풍자입니다. 백인 우월주의의 핵심 규격을 그대로 제도화한 집단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요약: 혁명의 스펙타클보다 한 사람을 끝까지 지키려는 관계의 힘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밥과 윌라의 서사가 보여줍니다.

 

PTA의 연출이 이번에 특히 다른 이유

폴 토마스 앤더슨 영화를 꾸준히 봐온 입장에서 이번 작품은 조금 달랐습니다. 기존 작품들이 인물의 심리를 끝까지 파고드는 밀도 높은 드라마였다면, 이번에는 장르적 재미와 정치적 풍자, 블랙코미디가 동시에 돌아가는 다층적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연출이 절대 과시적이지 않습니다.

마이클 바오만의 촬영은 시네마-베리테(cinéma-vérité) 스타일로 출발합니다. 시네마-베리테란 다큐멘터리적 사실감을 추구해 핸드헬드 카메라와 자연광을 활용하는 촬영 기법으로, 픽션에 적용하면 극적인 긴장감을 현실감 있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기법이 세르지오의 지하 탈출 네트워크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졌고, 마지막 아스팔트 언덕 추격전에서는 클로즈업을 풍경처럼 쓰는 PTA 특유의 문법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들어봤는데,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순간마다 음악이 먼저 그 불안정성을 예고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서사의 에너지를 배가시키는 방식이 기존 PTA 작품들과 다르게 훨씬 더 빠른 호흡으로 작동했습니다.

시의성(timeliness)이라는 측면도 중요합니다. 시의성이란 작품이 현재의 사회적·정치적 맥락과 얼마나 정확히 맞닿아 있는지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1960년대 미국의 급진적 저항 운동과 국가 권력의 충돌을 불러와 오늘날의 이민 정책과 인종 갈등, 권력층의 부패를 비추는 거울로 사용하는 방식이 전 세계 평단에서 오스카 유력 후보로 지목되는 이유 중 하나로 보입니다. 정치적인 영화인데 설교하지 않고, 예술영화인데 관객을 시험하지 않으며, 장르영화인데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균형감이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요약: 시네마-베리테 촬영과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 그리고 과시하지 않는 연출이 합쳐져 PTA 커리어에서도 특별한 균형감을 가진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배경 지식 없이 봐도 재미있나요?

A.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 급진주의나 코인텔프로 같은 역사적 맥락을 알면 장면마다 다른 층위가 보이지만, 몰라도 추격극과 블랙코미디 자체로 흡입력이 충분합니다. 처음 보는 분이라면 역사 공부보다 인물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 오히려 더 즐겁게 볼 수 있습니다.

 

Q. 숀 펜 연기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가요?

A. 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게 숀 펜의 록조였습니다. 강인함을 과시하면서도 내면은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모순된 인물을 아주 입체적으로 소화해 냈습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면접 장면에서의 대사 하나로 캐릭터 전체를 뒤집어 버리는 연기는 보는 내내 소름이 돋았습니다.

 

Q.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은 실제 조직을 모델로 한 건가요?

A. 영화 속 설정이지만 실존하는 보헤미안 그로브(Bohemian Grove)와 여러 극우 비밀 조직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헤미안 그로브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실재하는 폐쇄적 엘리트 클럽으로, 미국 권력층 인사들이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사실이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는 이 조직의 특성을 과장·압축해 백인 우월주의적 특권 구조를 직접 겨냥하는 방식으로 활용했습니다.

 

Q. 이 영화가 오스카 유력 후보라고 하는데 어떤 부문이 기대되나요?

A.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숀 펜) 등이 가장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의성과 예술성, 장르적 재미를 동시에 갖춘 작품이 드물다는 평이 많아 작품상 경쟁에서 강력한 후보로 꼽히는 분위기입니다. 다만 오스카 레이스는 변수가 많으니 결과를 단정하기보다는 지켜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론

극장을 나오면서 제가 든 생각은 딱 하나였습니다. 이런 영화와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지를 이 영화를 보고서야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풍자와 블랙코미디, 추격극이 한 그릇 안에 담겨 있는데도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희생시키지 않는 균형감이 놀라웠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혁명은 구호나 총기보다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 더 가깝습니다.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이라면 꼭 보시길 권합니다. 표면만 보고 즐겨도 충분히 재미있고, 한 겹 더 들어가면 다른 영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rs1rcAVx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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