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직한 남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영화인데, 보는 내내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뒤 국내 개봉했고, 저는 극장을 나오면서도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재미있었던 건지, 불편했던 건지, 솔직히 그 경계가 잘 안 잡혔거든요.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 도대체 뭐가 문제였나
직장을 잃으면 사람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영화는 이 질문을 꽤 잔인한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유만수는 태양제지에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 직원입니다. 올해 펄프맨상까지 수상할 만큼 업계에서 인정받았죠. 그런데 미국계 사모 펀드(Private Equity Fund)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하루아침에 구조조정 대상이 됩니다. 여기서 사모 펀드란 소수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매각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내는 투자 구조를 의미합니다. 노동자의 근속 연수나 기여도는 그 계산식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경력이 길다는 건 곧 연봉이 높고 나이도 많다는 뜻이기에, 구조조정의 도끼는 오히려 오래 일한 사람을 먼저 겨냥합니다. 영화가 해고를 '도끼질(ax)'로 표현하는 건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닙니다. 미국식 표현인 "getting the ax"를 한국어로 옮기면서, 그 폭력성을 고스란히 화면 위로 끌어올리는 장치입니다.
만수는 3개월 안에 재취직하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하고 필사적으로 구직 활동을 벌이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뿐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그가 단순히 돈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정체성, 스스로 일궈낸 집,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의 체면 같은 것들이 전부 직장이라는 한 점에 매달려 있었던 거죠.
결국 만수는 기묘한 결심을 합니다. 경쟁자들을 직접 제거하겠다는 것입니다. 허위 구인 광고를 내 이력서를 수집하고, 경쟁이 될 만한 인물들을 추려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가 제거하려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구범모 — 알코올 중독자로 가정이 파탄 직전이지만 일본 제지업계 경력을 보유한 실직자
- 고시조 — 제지업계 출신이지만 지금은 구두 가게 점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인물
- 최선출 — 현재 잘 나가는 제지 회사의 반장. 유일하게 현직에 있는 경쟁자
이 세 사람 모두 만수와 똑같이 종이업계에서 수십 년을 버텨온 사람들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오래 생각했습니다. 만수는 자신을 밀어낸 시스템과 싸우는 대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짓밟는 쪽을 택한 겁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위치·조명·소품·공간 구성이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박찬욱 감독은 건축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공간 자체를 이야기의 언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만수의 저택은 그가 평생 일궈낸 삶의 형태를 담은 공간인 동시에, 그 삶이 무너지는 무대가 됩니다.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사 그 자체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인가, 자기합리화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이 제목이 꽤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체념처럼 들렸는데, 다시 생각할수록 아주 불쾌한 주문처럼 느껴졌거든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은 영화 안에서 세 번의 맥락으로 반복됩니다. 미국 본사가 해고를 통보하며 이 말을 사용하고, 새로운 고용주는 AI 자동화 도입을 정당화하며 같은 말을 하고, 만수 역시 살인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이 말을 주입합니다. 이 세 주체가 동일한 문장을 사용한다는 게 영화의 핵심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연속으로 보면서 느낀 불편함은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위에서 누군가를 쓸어버릴 때 쓰는 말과, 아래에서 누군가를 죽이려 할 때 쓰는 말이 완전히 같다는 것. 그 말이 논리적 정당화인지 감정적 마비인지조차 구분이 안 된다는 것.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이 영화의 정서적 중심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미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집을 팔고 전세로 옮길 수도 있고, 다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자신의 커리어를 살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런데 만수는 그 모든 선택지가 자신이 누려온 삶과 멀어지는 길이라는 이유로 전부 거부합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아이러니(narrative irony)가 작동합니다. 내러티브 아이러니란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거나, 인물의 행동이 의도와 반대 결과를 낳을 때 발생하는 서사적 긴장감입니다. 만수의 살인 계획이 얼마나 허술한지, 그리고 그가 제거하려는 사람들과 자신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관객은 보는 내내 인식하지만, 만수 본인은 끝까지 자신의 논리 안에 갇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결국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일 때가 아니라 사실이 아닌데도 그렇게 믿고 싶을 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 만수에게는 선택지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만 그 선택들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향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이 캐릭터를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이 극장을 나오면서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카리스마를 쥐었다 내려놓으며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식, 그 행동은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그 동기는 이해 가능한 그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는 실력은, 솔직히 말해 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영화 전체가 흔들렸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Westlake)의 1997년 소설 『더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합니다(출처: IMDb, 어쩔 수가 없다). 원작 소설은 미국 중산층 남성의 몰락을 냉소적으로 그린 범죄 소설로, 박찬욱 감독과 이경미 작가가 이를 한국의 제지 산업과 구조조정 현실에 맞게 현대적으로 각색했습니다. 한국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비자발적 이직률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의 배경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출처: 통계청).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 원작 소설이 있다던데 꼭 읽고 봐야 하나요?
A. 원작을 읽지 않아도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액스』를 기반으로 하지만, 박찬욱 감독이 한국 제지 산업과 구조조정 현실에 맞게 완전히 새로 각색했기 때문에 배경지식 없이도 몰입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원작을 모를수록 전개가 더 신선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Q. 블랙코미디라는데, 폭력 장면이 많아서 보기 불편하지 않나요?
A. 폭력 장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박찬욱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 덕분에 직접적으로 잔인한 느낌보다는 기묘하고 우스운 분위기로 소화됩니다. 살벌한 상황인데도 웃음이 나고, 웃다가도 갑자기 섬뜩해지는 순간이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극단적인 고어 영화를 기대하고 가면 오히려 의외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Q. 손예진 역할이 영화에서 얼마나 비중이 있나요?
A. 단순한 조력자 역할이 아닙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영화의 정서적 균형을 잡아주는 핵심 인물로, 만수가 선택을 회피할 때마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쪽에 있습니다. 대사의 밀도와 존재감 면에서 이병헌과 대등하게 스크린을 채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Q. 베니스 영화제 기립박수 9분, 과장 아닌가요?
A. 베니스 국제 영화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 중 하나로, 기립박수 지속 시간은 현장 언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기록됩니다. 9분이라는 수치는 여러 매체에서 동일하게 보도된 수치입니다. 물론 기립박수가 영화의 절대적인 품질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이 영화의 경우 저도 직접 보고 나서 그 반응이 충분히 납득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론
극장을 나오면서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습니다. 정신없이 웃다가, 어느 순간 그 웃음이 너무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만수의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느끼면서도, 그 동기만큼은 어딘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직장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수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 그 감각이 사람을 얼마나 비틀 수 있는지를 영화는 꽤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헤어질 결심' 이후 박찬욱 감독의 전성기가 끝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 걱정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코미디와 비극을 어디서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관객을 언제 웃기고 언제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감독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이병헌과 손예진의 연기, 공간을 이야기로 만드는 미장센, 그리고 "어쩔 수가 없다"는 그 한 문장이 만들어내는 층위들까지.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