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죽음은 정말 가벼워질까요? 〈미키 17〉을 보는 내내 저는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에드워드 에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는, SF의 껍데기를 빌려 그 안에 계급과 노동, 권력에 대한 날 선 풍자를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개봉 전부터 기대와 우려가 엇갈렸던 작품인 만큼, 직접 보고 나서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소모품이 된 인간 — 익스팬더블 설정과 세계관
영화의 핵심 설정은 '익스팬더블(Expendable)'입니다. 여기서 익스팬더블이란, 신체를 스캔해 기억을 저장하고 죽으면 새 몸으로 복제해 재투입하는 1회용 인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죽어도 되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구조입니다.
주인공 미키 반즈는 빚을 피해 지구 탈출용 우주 식민지 프로그램에 지원하다가 이 익스팬더블직을 맡게 됩니다. 극한 환경의 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해서도 온갖 위험한 임무에 반복 투입되고, 그렇게 죽을 때마다 다음 번호가 프린트되어 나옵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이미 미키는 열일곱 번째입니다.
제가 이 장면들을 보면서 불편했던 건, 미키가 죽는 과정이 너무 무성의하게 묘사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복제 신체가 선반도 없이 그냥 바닥에 떨어지고, 케이블이 발에 걸려 엉망으로 프린트됩니다. 이 연출이 단순한 블랙코미디로 보이다가도, 계속 반복되면서 한 사람의 죽음이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무가치하게 처리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다룬 연구로, 국제노동기구(ILO)는 위험 직종 종사자들의 심리적 소진과 노동 존엄성 문제를 반복적으로 다뤄왔습니다(출처: 국제노동기구(ILO)). 미키가 처한 상황은 극단적 SF 설정이지만, 사람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저도 일을 하면서 '내가 없어도 이 조직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겠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미키가 번호로 불리며 교체되는 모습은 그 감각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더 웃기면서도 불편했습니다.
영화 중반, 미키가 크레바스에 빠져 토착 생명체인 크리퍼와 마주치는 장면에서 저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죽음에 달관한 듯 보이던 미키가 "그냥 통째로 삼켜줬으면"이라고 중얼거립니다. 복제가 가능하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죽어도 되는 존재와 죽이면 안 되는 존재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를 이 한 줄이 꽤 선명하게 짚어냅니다.
- 익스팬더블: 복제·재투입이 가능한 소모품 인력 제도
- 멀티플(Multiple): 동일 복제 인격체가 동시에 둘 이상 존재하는 상태로, 영화 내에서 중범죄로 규정됨
- 크리퍼: 행성 니플하임의 토착 생명체. 영화 후반 갈등과 화해의 핵심 열쇠로 작동
- 복제 이후의 기억 이식: 죽기 전 백업된 기억을 다음 버전에 이식하는 방식으로, 연속된 자아의 문제를 제기
계급 풍자로 수렴하는 봉준호의 선택 —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봉준호 감독이 〈미키 17〉에서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은 단연 케네스 마셜입니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이 인물은 우주선을 통치하는 식민지 탐의 책임자이자, 영화가 직접적으로 '독재자'라고 부르는 존재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그를 유능한 악당이 아니라 허영과 무지로 가득 찬 어릿광대로 빚어놨거든요.
마셜은 기초 과학조차 모르면서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하고, 가임기 여성이 사망하자 인류 번성 운운하며 망언을 내뱉습니다. 함께 사치와 향락을 즐기는 배우자 일파 역시 선전용 장식품으로 묘사됩니다. 이 커플을 보고 있으면 불편하다기보다 실소가 먼저 나오는데, 그게 봉준호 특유의 방식입니다. 권력자는 반드시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통념을 비틀고, 어설프고 무능한 자도 시스템이 허락하면 타인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우스꽝스럽게, 그래서 더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디스토피아(dystopia)적 세계관—이상적 사회와 정반대로 억압과 통제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 사회—을 배경으로 한 이런 풍자 방식은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도 이미 확인된 봉준호의 문법입니다. 〈미키 17〉에서는 그 무대가 우주로 넓어졌을 뿐, 계층 간 착취와 부조리한 권력 구조라는 주제는 일관되게 이어집니다. 제가 예고편을 처음 봤을 때 '〈옥자〉와 〈설국열차〉를 합쳐 놓은 것 같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그 두 영화보다 풍자의 밀도가 한 층 더 촘촘했습니다.
문제는 이 선명한 계급 비판이 영화의 다른 가능성을 일부 덮어버린다는 점입니다. '복제된 나는 원래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철학에서는 이를 개인 동일성(personal identity) 문제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해 기억과 몸이 복제되면 그 존재는 원본과 같은 사람인가를 따지는 질문입니다—은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질문을 깊게 파고들기보다, 두 미키가 협력해 독재자를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갑니다.
이 지점에 대해서는 시각이 갈립니다. "SF 설정이 가진 철학적 잠재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아쉬움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이 원작의 제목 '미키 7'에서 '미키 17'로 숫자를 바꾸면서까지 자신만의 이야기를 독자적으로 구성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단순한 각색이 아니라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적으로도 이 메시지는 일관됩니다. 캐서린 조지가 디자인한 의상은 단색의 노동복 일색이고, 피오나 크롬비가 만든 우주선 세트는 탄광 현장을 연상시킵니다.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한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지칭하는 영화 용어—이 계급의 메시지를 서사와 함께 이중으로 강화하는 방식입니다. 로튼 토마토 기준 북미 개봉 당시 토마토 미터 88%, IMDb 7.4점을 기록한 것도 이런 연출의 완성도가 평단에 고르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출처: Rotten Tomatoes).
제 경험상 이런 영화는 기대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갈립니다. SF적 상상력과 실존적 질문을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고, 봉준호식 블랙코미디와 계급 풍자를 원했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저는 솔직히 둘 다 원했고, 반쯤은 만족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키 17 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가 크나요?
A. 꽤 큽니다. 원작 제목은 '미키 7'이고, 영화에는 원작에 없던 인물과 사건, 죽음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원작에서 익스팬더블은 인격체로 인정받는 설정인데 영화에서는 그 인격체성을 처음부터 박탈한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원작의 SF 틀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적으로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원작과 비교하며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Q. 봉준호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즐길 수 있나요?
A.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봅니다. 서구적 SF의 외연을 갖추고 있어 장르 진입 장벽이 낮고, 블랙코미디 요소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만 계급 비판과 정치 풍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라면 다소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Q. 멀티플이 정확히 뭔가요? 영화에서 왜 문제가 되나요?
A. 멀티플(Multiple)이란 동일한 복제 인격체가 동시에 둘 이상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영화 설정 안에서 이는 중범죄로, 발각되면 둘 중 하나가 삭제 처분됩니다. 미키 17이 죽지 않고 돌아온 상태에서 미키 18이 이미 프린트되면서 이 문제가 발생하고, 이후 두 미키가 이 사실을 숨기며 협력하는 것이 영화 중반부의 핵심 갈등입니다.
Q.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어떤가요?
A. 제 경험상 이 역할은 패틴슨이 아니었다면 완성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알 듯 모를 듯한 표정과 심드렁한 태도로 죽음에 달관한 미키를 표현하는데, 과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이 살아 있습니다. 순한맛 미키 17과 매운맛 미키 18의 성격 차이를 몸으로 구분해내는 부분도 꽤 흥미롭습니다.
결론
〈미키 17〉은 죽지 않는 인간에 대한 영화가 아닙니다. 죽여도 된다고 판단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영화입니다. 제가 직접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감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SF적 실존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1억 5천만 달러 규모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이 정도로 노골적인 노동 착취와 계급 풍자를 밀어붙인 것 자체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라고 봅니다.
봉준호의 문법에 익숙하다면 더 즐길 수 있고, 처음 접하는 분이라도 블랙코미디로서의 재미는 충분합니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말하는 소모품이 현실에서 누구일까'를 한 번쯤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값어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