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에는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아가는 소녀'라는 설정이 흥미롭긴 했지만, 반전 하나로 끝날 이야기처럼 보였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남았습니다. 2022년 공개된 넷플릭스 영화 <더 원더>는 종교적 믿음과 공동체가 한 아이에게 어떤 잔인함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입니다.

맹목적 믿음이 만들어낸 감옥
영화의 배경은 1862년 아일랜드 대기근이 끝난 직후입니다. 영국인 간호사 립 라이트는 마을 위원회의 의뢰로 한 소녀를 관찰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소녀의 이름은 애나 오도넬, 4개월째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진 아이입니다.
처음 오두막을 찾았을 때 제가 느낀 감정은 불안함이었습니다. 소녀의 가족은 이 기적을 경제적, 종교적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마을 전체가 애나를 일종의 성물(聖物)처럼 대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성물이란 종교적 맥락에서 신성하거나 기적의 증거로 여겨지는 존재나 사물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애나는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품으로 소비되고 있었던 겁니다.
마을 의사는 아이의 건강 상태보다 자신의 과학적 연구 가치에 더 집착했고, 위원회는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애나의 어머니조차 딸의 쇠약함을 영적인 신호로 해석했죠. 가족과 공동체, 의학계가 각자 다른 이유로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기적이다." 그 어느 쪽도 "이 아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구도가 특정 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 체계를 지키기 위해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맹목적 믿음(blind faith)이란 증거나 반증과 무관하게 기존의 신념을 고수하는 심리 상태를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작동합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이러한 집단적 믿음 고착화 현상은 사회적 압력과 긴밀하게 연결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 마을 위원회 — 사건 축소 및 현상 유지가 최우선 목표
- 마을 의사 — 아이의 생명보다 연구적 가치에 집중
- 애나의 어머니 — 딸의 쇠약함을 신앙의 증거로 해석
- 마을 주민들 — 집단적 믿음을 강화하는 방문과 헌금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자기 처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애나가 음식을 거부하는 진짜 이유가 드러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화면을 멈추고 잠깐 생각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불편한 진실이었거든요.
애나는 생전에 오빠와 근친상간(incest)이라는 금지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근친상간이란 가족 구성원 사이의 성적 관계로, 법적·도덕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행위를 말합니다. 문제는 애나가 이 관계에서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믿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빠가 죽은 뒤, 그녀는 자신이 단식과 고행을 통해 오빠의 죄를 대신 씻어낼 수 있다는 신념에 사로잡힙니다.
어린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잔인한 장면이었습니다. 애나는 피해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종교 공동체가 만들어낸 죄책감의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죄책감의 내면화(internalization of guilt)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현상은, 쉽게 말해 외부에서 부과된 수치와 죄의식이 개인의 자기 인식 자체를 바꾸어버리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애나의 단식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 행위는 완전히 진심에서 나온, 그러나 너무나 잘못 설계된 구원 방식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영화가 단순한 종교 비판이나 반전 스릴러를 넘어선다고 느꼈습니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학습하게 만드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의 침묵이 이 영화의 핵심 공포라고 보입니다.
립이 애나의 방에서 죽은 오빠의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 작은 유품 하나가 애나의 세계 전체를 설명해주는 물건이었으니까요. 아동 심리 분야에서도 성적 학대를 경험한 아동이 수치심과 자기 처벌 행동을 내면화하는 경향이 높다는 점은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출처: WHO — Child Maltreatment).
구원이란 무엇인가 — 립이 택한 방식
간호사 립은 처음부터 중립적인 관찰자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아이를 잃은 상실감이라는 내면의 균열을 안고 있었고, 그 상처가 오히려 애나를 단순한 관찰 대상이 아닌 반드시 살려야 할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상 가장 좋은 관찰자는 완벽하게 중립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취약함을 아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립은 점차 확신하게 됩니다. 설득으로는 애나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마을의 질서 안에서 아무리 진실을 말해봤자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고, 실제로 진실을 밝혔을 때 돌아온 것은 외면과 불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오두막을 불태우고 애나의 죽음을 위장해 새로운 이름과 가족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말에 대해서는 솔직히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시원하고 따뜻했는데, 한편으로는 이 해결 방식이 현실에서라면 너무 극단적이고 법적·윤리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남긴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기존 질서를 완전히 깨뜨리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는 설정은 강렬하지만, 그만큼 현실적 대안을 차단해버리는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건강해진 애나가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 한 사람을 살리는 데 거창한 기적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어주는 누군가, 그것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마지막에 수녀가 종교적 신념과 인간적 연민 사이에서 고뇌하다 애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장면은, 종교와 연민이 반드시 대립하지는 않는다는 여지를 남기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작은 '룸(Room)'의 작가 엠마 도노휴의 동명 소설이며, 플로렌스 퓨는 이 작품으로 억압된 감정과 이성적 판단 사이를 오가는 립을 설득력 있게 연기해냈습니다. 영화는 내러티브 장치(narrative device), 즉 이야기 바깥에서 이야기를 설명하는 메타적 구조도 활용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 영화가 스스로 "이것은 이야기입니다"라고 선언하면서 관객에게 비판적 거리를 요청하는 기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더 원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직접적인 실화는 아니지만 완전한 허구도 아닙니다. 19세기 유럽과 아일랜드에서는 단식 소녀(fasting girl)로 불리는 사례들이 실제로 보고된 바 있으며, 작가 엠마 도노휴는 이러한 역사적 현상에서 영감을 받아 소설을 썼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맥락과 맞닿아 있어 픽션이지만 상당한 사실적 무게감이 있습니다.
Q. 애나는 진짜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건가요?
A. 아닙니다. 영화는 초반에 이 질문을 열어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기도를 빌미로 매일 밤 애나에게 음식을 몰래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단순한 트릭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가족이 기적을 지속시키기 위해 아이를 공모자로 만들었다는 점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습니다.
Q. 결말에서 립이 오두막을 불태운 이유가 뭔가요?
A. 애나를 기존 공동체의 질서에서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한 선택입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립은 애나의 죽음을 위장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이 결말을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오히려 이 영화의 의도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질서가 너무 단단할 때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Q. 이 영화가 반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나요?
A. 종교 자체를 비판한다기보다는 믿음이 도구화될 때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 캐릭터들이 다소 완고하게 그려지는 면이 있어 선악 구도가 단순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데, 마지막에 수녀가 애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장면은 그 단순함에 균열을 냅니다. 종교와 연민이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기는 결말입니다.
결론
<더 원더>를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건 결말의 따뜻함이 아니라, 그 따뜻함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눈앞의 아이를 외면했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맹목적 믿음, 연구적 호기심, 공동체의 명예 — 저마다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아무도 애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가, 아니면 눈앞의 사람을 실제로 바라보는가. 그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적 배경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고, 플로렌스 퓨의 절제된 연기는 영화 내내 든든한 중심을 잡아줍니다. 심리적으로 묵직한 영화를 찾고 있다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