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는 질문에 90% 이상이 둘 다 아니라고 답했다는 설문 결과가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실제 조사입니다. 스티븐 연의 이야기를 처음 제대로 들었을 때, 저는 그 숫자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어딘가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감각이 한 사람의 성격과 진로, 심지어 연기 스타일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정체성: 두 세계 사이에서 자란 배우
학교에서 유독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아이였던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그런 경험이 없지만, 스티븐 연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게 타고난 성격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는 원래 시끄럽고 활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미국 사회가 동양인 남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 즉 조용하고 수줍어야 한다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성격 자체가 그 틀에 맞춰져 갔다고 합니다. 스테레오타입이란 특정 집단에 대해 사회가 고정적으로 갖고 있는 단순화된 이미지를 말합니다. 문제는 그게 외부의 시선에서 그치지 않고, 결국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입니다.
집에서는 "왜 젓가락질을 못하냐"는 말을 들었고, 밖에서는 충분히 미국인답지 않다는 시선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중간 어딘가에 놓인 사람이 겪는 혼란을 스티븐 연은 꽤 오랫동안 안고 살았습니다. 그나마 자신의 에너지를 온전히 꺼낼 수 있었던 공간은 집과 한인교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제 기억에 유독 강하게 남은 이유는, 소속감이 없다는 게 단순히 외롭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걸 그 대목에서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존 조(John Cho)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미국 사회는 저에게 너무 미국인스럽지 않다고 말하고, 부모님은 전통 한국인답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매 순간이 혼란이었습니다." 스티븐 연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로 꼽은 존 조가 같은 경험을 같은 언어로 묘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것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한 세대 전체의 이야기임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민 2세대가 겪는 문화적 정체성 혼란은 심리학에서 이중문화 정체성(bicultural identity)이라는 개념으로 연구됩니다. 여기서 이중문화 정체성이란 두 가지 문화적 배경을 동시에 내면화하면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 집 안: 한국 문화적 기준으로 "충분히 한국인답지 않다"는 압박
- 학교·사회: 아시아인에게 부여된 스테레오타입에 맞춰야 한다는 압력
- 결과: 공간에 따라 다른 성격을 연기하며 자라는 이중적 자아 형성
필모그래피: 편견을 깨온 역할들의 계보
스티븐 연의 필모그래피를 순서대로 따라가면 흥미로운 패턴이 보입니다. 저는 처음에 워킹 데드의 글렌으로 그를 기억했습니다. 좀비 세계관 속에서도 따뜻함과 리더십을 잃지 않는 캐릭터였고, 제가 느끼기엔 그 선한 이미지가 스티븐 연 자신과 거의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작품들을 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좁은 인식이었는지 알았습니다.
워킹 데드 이전, 할리우드 오디션 현장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훌륭한 독백 연기를 마친 스티븐에게 심사위원들이 "어설픈 아시아인 발음으로 다시 해보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아시아인 캐릭터란 어설픈 영어 발음, 우스꽝스러운 외모, 혹은 아예 백인이 분장하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옐로페이스(yellowface)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비아시아계 배우가 아시아인 역할을 연기하며 외모를 과장 묘사하는 관행을 말합니다. 오드리 헵번 주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출처: IMDb)에 등장하는 일본인 캐릭터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워킹 데드의 글렌은 이 흐름에서 분명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시즌 5에서 역대 케이블 드라마 역사상 최다 시청자 수를 기록할 만큼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조연이 아닌 실질적 주연급 캐릭터로 활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글렌 이후의 선택들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에서는 거짓말과 선의가 공존하는 다층적인 인물을,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서는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냉랭하고 미스터리한 벤을 연기했습니다. 글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 버닝을 봤을 때 저는 같은 배우인지 두 번 확인했습니다.
버닝에서 스티븐 연은 생애 처음으로 교포 역할이 아닌 온전한 한국인 캐릭터를, 모든 대사를 한국어로만 소화해야 했습니다. 한국어가 어설프다는 이유로 출연을 오래 망설였다고 하는데, 결국 그 두려움을 안고 뛰어들었고 그 해 칸 영화제 출품작 중 최고 평점을 받았습니다. 일부 매체에서는 칸 역대 1위 평점이라는 평가도 내릴 정도였습니다.
소속감: 미나리가 그에게 남긴 것
미나리를 보고 나서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화면 속 야콥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스티븐 연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그가 평생 이해하려 했던 아버지를 닮은 누군가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스티븐 연 본인도 이 역할을 준비하면서 낯선 미국 땅에서 뿌리를 내리려 했던 아버지의 삶을 처음으로 온몸으로 이해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미국 문화 안에서 자란 자신과 달리, 한국식 마인드를 가진 아버지와는 커가면서 공감대를 잃어갔는데, 비슷한 나이의 이민 1세대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그 거리가 비로소 좁혀졌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 아버지가 스티븐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부자가 함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훈훈한 에피소드로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관계는 말로 설명되지 않다가 전혀 다른 매개를 통해서야 연결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엔 그 매개가 영화였습니다.
미나리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은 아니었지만, 202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스티븐 연은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90년이 넘는 아카데미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에서 그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후보에 오른 것 자체가 하나의 선례가 됐습니다. 이에 대해 "수상보다 후보 지명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문이 처음 열리는 순간이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 소속감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었는지 보입니다. 반드시 한국인이나 미국인 중 하나를 선택해서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어느 한쪽에서만 자란 배우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감수성과 스펙트럼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 경험상 어떤 결핍이 나중에 완전히 다른 종류의 능력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는데, 스티븐 연이 그 드문 사례처럼 보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티븐 연은 한국어를 잘 하나요?
A. 5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만큼 한국어가 완전히 유창하지는 않습니다. 버닝 촬영 당시에는 한국어 발음을 녹음해달라고 부탁해 외우는 방식으로 대사를 처리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어가 어설픈데 연기해도 되는지 오래 고민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저는 그 망설임이 오히려 그 역할에 진정성을 더해줬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Q. 스티븐 연이 워킹 데드에서 하차한 이유는 뭔가요?
A. 스티븐 연은 시즌 7에서 글렌 캐릭터의 사망으로 하차하게 됐습니다. 제작진의 결정이었고, 시청자들의 반발도 상당했습니다. 실제로 글렌 하차 이후 시청자 수가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주인공보다 더 인기 있는 캐릭터를 퇴장시키는 것이 드라마 전략상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지금도 의견이 나뉩니다.
Q. 스티븐 연이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영화가 미나리인가요?
A. 맞습니다. 2021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역대 최초였습니다. 최종 수상은 안소니 홉킨스에게 돌아갔지만, 후보 지명 자체가 90년이 넘는 아카데미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고 봅니다.
Q. 봉준호 감독이 스티븐 연을 캐스팅한 이유가 뭔가요?
A. 봉준호 감독은 스티븐 연을 캐스팅한 이유로 "거짓말을 섞으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얼굴을 가졌다"고 밝혔습니다. 스티븐 연 본인도 이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아직도 애매하다고 했는데, 저는 그게 배우에게 줄 수 있는 꽤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는 배우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
스티븐 연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고 나니 한 가지가 선명해졌습니다. 소속감이란 결국 어딘가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위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자리에서 평생 혼란을 겪어온 사람이, 결국 그 혼란 자체를 연기의 자원으로 바꿔냈다는 사실이 인상 깊습니다. 어떤 결핍은 나중에 가장 독특한 능력이 되기도 한다는 걸, 스티븐 연은 필모그래피 전체로 보여줍니다.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면, 봉준호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추는 미키 세븐을 기다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낼 새로운 캐릭터가 또 어떤 편견을 허물게 될지, 제 경험상 봉준호와 스티븐 연의 조합은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