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배우를 오래 봐왔는데, 어느 날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 이전에 봤던 장면들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칼렛 요한슨의 초기 이야기를 알게 된 날 그런 감각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그 특유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강점으로 통하지만, 그 목소리 때문에 수없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동안 익숙하게 봐온 작품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번의 거절이 만든 목소리라는 무기
일곱 살짜리 아이가 TV에서 주디 갈랜드를 보고 배우를 꿈꿨다고 합니다. 어머니를 졸라 오디션장을 누비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입을 여는 순간마다 벌어졌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으레 "감기에 걸렸냐"고 물었고, 어떤 캐스팅 디렉터는 목캔디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아이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낮고 탁한 목소리는 당시 기준으로는 명백한 결격 사유였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좀 뭉클했습니다.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울었다는 묘사, 그리고 포기를 권하는 어머니에게 "제 꿈을 뺏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는 장면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더 가슴 아팠던 건 어느 날 드디어 합격 통보가 들어왔다 싶었는데, 그 대상이 함께 따라갔던 오빠였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살짜리가 감당하기엔 꽤 가혹한 경험이었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거절이 반복되다가 전환점이 된 작품이 1996년작 <매니 & 로>입니다. 여기서 스칼렛이 맡은 캐릭터는 어둡고 내성적인 꼬마였는데, 감독은 이 분위기와 스칼렛의 목소리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해 예고편 내레이션을 맡겼습니다. 단점으로 지적받던 것이 처음으로 장점으로 기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어 1998년작 <호스 위스퍼러>에서는 더 본격적인 활약이 펼쳐집니다. 이 영화에서 스칼렛은 승마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소녀를 연기했는데, 감독이 원래 제안했던 상대는 당시 이미 주목받고 있던 나탈리 포트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무산되면서 스칼렛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두 번째 선택이 더 잘 맞는 경우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이 작품이야말로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스칼렛은 캐스팅이 확정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 절단 장애인의 생활을 다룬 책들을 읽었고, 실제로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을 수소문해 계단 오르내리는 걸음걸이를 직접 관찰하며 몸에 익혔습니다. 이걸 아역배우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더 놀랍습니다.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스칼렛은 아역배우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당시 경쟁자 명단에는 일라이자 우드, 조셉 고든 레빗, 커스틴 던스트가 있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역할 준비를 배우 업계에서는 메서드 리서치(Method Research)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메서드 리서치란 배우가 캐릭터를 표면적으로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실제 처한 신체적·심리적 상황을 직접 체험하거나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연기의 진실성을 확보하는 접근 방식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이런 방식으로 역할에 임했다는 점은 지금의 스칼렛 요한슨이 단순히 외모나 분위기로만 주목받는 배우가 아니라는 근거 중 하나입니다.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넘어가는 전환점에서도 목소리는 계속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003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연출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당시 열일곱 살이던 스칼렛이 성인 역할을 맡기엔 너무 어리다는 주변 반대를 무릅쓰고 캐스팅을 밀어붙였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는 젊은 여성의 쓸쓸한 감정을 담아낼 목소리로 스칼렛만큼 적합한 배우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약 1억 2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30배에 달하는 수익을 기록했고(출처: Box Office Mojo), 스칼렛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 9살 첫 출연작 <노스> — 흥행 참패, 그러나 가능성 인정
- <매니 & 로>(1996) — 목소리가 처음으로 긍정적 요소로 작용한 작품
- <호스 위스퍼러>(1998) — 메서드 리서치로 아역 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
-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 — 골든글로브 후보,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의 성공적 전환
블랙 위도우 너머의 배우, 스칼렛 요한슨
스칼렛 요한슨을 마블 시리즈의 블랙 위도우로만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여러 작품을 찾아보면서 느낀 건, 이 배우의 진짜 폭은 액션이나 외모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13년작 <그녀>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에서 스칼렛은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습니다. 오직 목소리만으로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연기했고, 영화 전체의 감정적 무게를 혼자 지탱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면에 등장조차 하지 않는데도 존재감이 이렇게 강할 수 있다는 게 낯설었습니다.
이 역할이 만들어진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난 상태에서, 이미 다른 배우(사만다 모튼)의 녹음까지 완료된 상황에서 전면 재녹음을 결정했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영화의 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낙점된 것이 스칼렛 요한슨이었습니다. 감독이 요청한 디렉션은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들리되, 듣는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저는 이게 배우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난해한 주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출처: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블랙 위도우 캐스팅 과정도 따지고 보면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원래 아이언맨 2의 블랙 위도우 역할은 에밀리 블런트와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촬영 일정 충돌로 무산되었고, 그 자리에 스칼렛이 들어왔습니다. 스칼렛 본인은 이에 대해 "제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기분 좋은 연락은 한 번 거절당했던 배역에 대해 다시 재캐스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런 발언을 들으면 "두 번째 선택이 오히려 더 잘 맞을 수 있다"는 말이 이 배우에게는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는 분명 스칼렛에게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져다줬지만, 아쉬운 부분도 솔직히 있습니다. 오랫동안 남성 히어로들을 지원하는 역할에 머물렀고, 단독 영화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내에서 이 캐릭터가 처음 등장한 지 무려 11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여기서 MCU란 마블 스튜디오가 구축한 하나의 연속적인 세계관을 공유하는 영화·드라마 시리즈 전체를 가리키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단독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건 캐릭터 활용 면에서 한계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 이야기>(2019)와 <조조 래빗>(2019)이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이 두 작품에서 스칼렛은 어머니이자 한 인간으로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냈고, 같은 해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두 부문에 동시 후보로 오르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배우는 드뭅니다. 액션과 드라마와 보이스 액팅을 모두 오가면서도 매번 그 장르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배우가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스칼렛 요한슨 목소리가 원래부터 낮았나요?
A. 네, 선천적으로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였습니다. 어린 시절 오디션장에서 심사위원들이 "감기에 걸렸냐"고 물을 정도로 또래 아역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높은 톤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해봤지만 결국 본래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만의 강점이 되었습니다.
Q. 스칼렛 요한슨이 처음 출연한 영화가 뭔가요?
A. 1994년작 <노스>가 첫 출연작입니다. 일라이자 우드 주연, 브루스 윌리스 출연의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제작비의 25%도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이후 스칼렛의 가능성을 알아본 쪽에서 1996년작 <매니 & 로>로 이어지게 됩니다.
Q. 영화 <그녀>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처음부터 캐스팅된 건가요?
A. 아닙니다. 원래 사만다 모튼이 모든 녹음을 완료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감독 스파이크 존즈가 영화의 톤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전면 재녹음을 결정했고, 이때 스칼렛 요한슨이 낙점되었습니다. 스칼렛이 감독의 집에서 8시간에 걸친 비공식 오디션을 거쳐 역할을 맡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Q. 블랙 위도우 역할은 원래 다른 배우가 맡을 예정이었나요?
A. 맞습니다. 아이언맨 2의 블랙 위도우 역할은 에밀리 블런트와 계약 직전까지 진행되었지만 당시 촬영 중이던 <걸리버 여행기>의 일정과 겹쳐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되어 이후 10년 이상 이 캐릭터를 이어가게 됩니다.
Q. 스칼렛 요한슨이 아카데미에 두 부문 동시 후보로 오른 적이 있나요?
A. 네,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결혼 이야기>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조조 래빗>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한 배우가 같은 해 시상식에서 두 부문 후보에 동시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라 당시 상당한 화제가 되었습니다.
결론
스칼렛 요한슨의 초기 이야기를 알고 나서 제가 느낀 건, 익숙하게 봐온 것들이 사실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감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수없이 거절당하고, 오빠만 합격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고,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야 지금의 필모그래피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나니 작품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다만 앞으로에 대해선 기대와 바람이 섞여 있습니다. 할리우드가 오랫동안 그의 섹시한 이미지를 과도하게 전면에 내세워왔고, 블랙 위도우라는 캐릭터도 독립적인 서사를 너무 늦게 받았다는 점은 아쉽게 남습니다. 반면 나이와 함께 변화하는 얼굴과 목소리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역할들을 앞으로 더 많이 만나길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거절을 견디며 단점을 개성으로 바꿔온 배우가 앞으로 어떤 캐릭터를 선택할지, 저는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