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미슐랭 스타 셰프가 조선시대로 떨어져 폭군의 수라간을 책임지게 된다는 설정.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솔직히 '가벼운 로맨스 판타지겠구나' 하고 낮게 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따라가다 보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음식이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서사 전체를 움직이는 장치로 쓰인 드라마였습니다.

타임슬립이라는 설정, 어디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요?
타임슬립(time-slip)이란 특정 인물이 현재와 다른 시간대로 이동하는 서사 장치입니다. 쉽게 말해 시간여행의 일종인데,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나 미래로 끌려가는 형태를 말합니다. 국내 드라마에서 이 설정은 이미 수십 편이 소비된 탓에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작품이 그 함정을 피한 방식은 '무엇으로 떨어졌는가'보다 '거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집중한 것입니다. 현대 셰프인 지영이 조선에서 살아남는 수단이 오직 요리 실력 하나라는 구조는, 타임슬립을 판타지 설정으로 소비하는 대신 생존 서사로 바꿔줍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몰입한 지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특히 수비드(sous-vide) 기법이 등장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비드란 재료를 진공 밀봉한 뒤 낮은 온도의 물에 오랜 시간 가열해 육질을 부드럽게 만드는 조리법입니다. 49도에서 55도 사이에서 소고기의 단백질인 미오신이 반응하면서 고기가 살살 녹는 식감이 만들어지는 원리인데, 조선 시대 사람들이 접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고기를 내놓으니 말 그대로 '당대의 수준을 벗어난 솜씨'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제가 직접 수비드로 고기를 익혀봤는데, 실제로 일반 조리와 식감 차이가 꽤 납니다. 그걸 아는 상태에서 보니 그 장면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 타임슬립 설정을 생존 서사와 연결해 신선함을 유지
- 수비드, 압력 조리 등 현대 조리 기법이 극의 긴장감을 만드는 도구로 기능
- 판타지 장치로 소비하지 않고 인물의 실력과 직결시킨 구성
폭군이라는 단어 하나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에서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부분은 연이군 이연의 인물 설계입니다. 역사 기록 속 연산군은 '조선 최대의 폭군'이라는 평가가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평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내면을 함께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왜곡된 믿음, 주변 신하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고립감, 왕이라는 자리가 만들어내는 구조적 외로움. 이런 맥락 없이 행동만 놓고 보면 폭군이지만, 맥락을 함께 보면 상처 입은 사람의 확장된 분노로 읽힙니다. 저는 이 부분이 꽤 잘 설계됐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인물 재해석을 한다고 해서 폭력을 면죄부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지영이 "당신은 절대 폭군이 되어선 안 된다"고 막아서는 장면, 복수가 어머니가 바랐던 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이연 스스로 깨닫는 장면이 그 균형을 잡아줍니다.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 상처가 타인을 해치는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인물 재해석의 방식은 역사 드라마 비평에서도 주요 분석 대상이 됩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드라마 산업 보고서에서도 '역사 인물의 재맥락화'가 최근 사극의 주요 서사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이 드라마는 그 전략을 꽤 설득력 있게 실행한 사례라고 봅니다.
요리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드라마가 보여줬습니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놀란 지점은, 요리 장면이 서사의 쉬어가기가 아니라 서사의 엔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된장 파스타 한 그릇이 이연의 어린 시절 기억을 끌어내고, 대왕대비가 찾던 '청량한 감칠맛'의 정체가 섬진강 제첩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집니다. 음식이 감정의 매개체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칠맛(うま味, umami)이라는 개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칠맛이란 단맛, 짠맛, 신맛, 쓴맛에 이어 다섯 번째 기본 맛으로 분류되는 미각입니다. 글루탐산이나 이노신산 같은 성분이 수용체를 자극할 때 느껴지는 깊고 풍부한 맛으로, 된장·조개류·버섯 등에 특히 풍부합니다. 드라마에서 제첩을 마지막에 추가하는 장면은 단순한 레시피 공개가 아니라, 미각의 과학을 서사에 녹여낸 장치인 셈입니다.
명나라 숙수들과의 경합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고춧가루가 사라지는 돌발 상황에서 비프 부르기뇽(bœuf bourguignon)으로 전환하는 장면은, 단순히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재료를 이해하고 대안을 찾는 셰프의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비프 부르기뇽이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유래한 와인 조림 요리로, 고기를 와인에 장시간 조려 깊은 풍미를 내는 방식입니다. 조선 시대 궁정에서 처음 접하는 향과 맛이었을 테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됩니다.
드라마 속 요리 장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실제 조리 전문가들의 평가도 엇갈리는 편입니다. 한국외식산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미디어 속 조리 장면이 시청자의 음식 인식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만큼, 이 분야는 단순한 연출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출처: 한국외식산업연구원). 제 경험상 요리 장면을 보고 실제로 수비드나 삼계탕을 찾아보게 됐으니, 그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폭군의 셰프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인가요?
A. 연산군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모티프로 삼고 있지만,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인물 이름과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역사 기록과 1대1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역사극보다는 역사적 배경을 활용한 판타지 로맨스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역사와 픽션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느냐가 이런 장르의 늘 있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Q. 드라마에 나오는 수비드 기법은 실제로 가정에서도 할 수 있나요?
A. 수비드는 전용 순환기(immersion circulator)가 있으면 가정에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진공 밀봉 장비가 없다면 지퍼백으로 대체하는 방식도 있습니다. 저도 직접 해봤는데, 고기의 식감이 일반 팬 조리와 확실히 달라집니다. 다만 조리 시간이 길어서 여유 있는 날에 시도하는 편이 좋습니다.
Q. 드라마에서 지영이 만든 된장 파스타는 실제 레시피인가요?
A. 된장 파스타는 실제로 존재하는 퓨전 요리입니다. 된장의 감칠맛과 버터의 풍미를 파스타 소스로 활용하는 방식인데, 국내 여러 레스토랑에서도 비슷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 레시피가 정확히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시금치 페스토를 더한다는 설정은 충분히 구현 가능한 조합입니다.
Q. 드라마 결말에서 지영은 결국 현재로 돌아오나요?
A. 최종화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망운록'이라는 책이 두 시대를 연결하는 장치로 쓰이며, 이연이 일기장에 남긴 기록이 지영과의 재회를 가능하게 합니다.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직접 보시는 편이 훨씬 좋을 텐데, 마지막 장면의 여운은 꽤 오래 남습니다.
결론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떠올린 장면은 화려한 경합 씬이 아니었습니다. 된장 파스타 한 그릇 앞에서 이연이 "외로웠겠구나"라고 말하는 조용한 장면이었습니다. 요리가 결국 기억이고 관계라는 것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폭군이라는 낙인은 역사 기록이 남긴 것이지만,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있었는지를 함께 묻는 것은 픽션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타임슬립이라는 설정이 다소 익숙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사건이 빠르게 쌓이는 아쉬움이 있더라도, 음식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짚어가는 방식만큼은 꽤 진심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궁중 요리나 타임슬립 서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직접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저는 분명히 예상보다 훨씬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