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금발, 핫핑크 드레스, 바람에 날리는 흰 치마. 저도 오랫동안 그 이미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미지 뒤에 어떤 삶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순간부터,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이 완전히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한 명의 양부모 가정을 전전하며, 수없이 실패하고 거절당하면서도 끝내 아이콘이 된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불우한 유년기 — 집에 있기조차 눈치 보였던 아이
어린 시절 집이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어릴 때 어른들이 싸우면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곤 했는데, 그 정도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마릴린 먼로는 아예 집 바깥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습니다. 집 앞 나무 위에 올라가 신문을 읽거나, 몇 시간씩 걸어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밤늦게 길에서 이런 모습을 본 노인이 "집에 가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을 건네자, "여기가 제 집인걸요"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읽을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마릴린의 이야기가 이렇게 된 출발점은 불과 아홉 살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정신증(psychosis) 증상—여기서 정신증이란 현실 인식이 무너져 환각이나 혼잣말, 격렬한 감정 기복이 반복되는 상태를 말합니다—으로 강제 입원되면서, 마릴린은 유일한 보호자를 잃었습니다. 이후 국가의 위탁 양육 제도(foster care system)에 따라 여러 가정을 옮겨 다니게 됩니다. 위탁 양육 제도란 친부모가 양육이 불가능한 경우 국가가 일시적으로 아동을 다른 가정에 맡기는 사회 복지 시스템입니다.
1950년대 미국의 위탁 가정 중에는 아이를 진심으로 돌보기보다 국가 보조금을 목적으로 신청한 경우도 적지 않았고, 마릴린의 처우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처참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가정은 마릴린을 아예 영화관으로 보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게 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배우라는 꿈의 씨앗이 됐습니다. 의도하지 않은 환경이 한 사람의 방향을 바꾼 셈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가장 오래 멈췄습니다. 가장 힘든 시간이 결국 가장 간절한 꿈을 만들었다는 게, 단순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육원 입소를 피하기 위해 열여섯 살에 결혼을 선택하고, 곧이어 전쟁으로 남편이 파병되고, 군수 공장에서 일하던 중 사진작가의 눈에 띄면서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아니라 상황에 떠밀려 온 경로였습니다.
- 아홉 살에 어머니의 강제 입원으로 보호자를 잃음
- 열한 명의 양부모 가정을 전전하며 유년기를 보냄
- 보육원 입소 회피를 위해 열여섯 살에 결혼을 선택
- 군수 공장 근무 중 우연히 모델 경력의 시작점을 맞이함
스타 탄생 — 실패를 59번 반복하면서도 멈추지 않은 사람
배우 데뷔를 꿈꾼다고 해서 바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릴린은 첫 영화사와 6개월 계약을 맺고 연기, 춤, 노래를 집중적으로 배웠지만, 계약이 끝나자마자 "연기력이 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렸습니다. 이후에도 주연을 맡은 저예산 뮤지컬 영화가 개봉 며칠 만에 극장에서 내려갔고, 파산 직전 상태에서 50달러를 받고 달력 누드 모델 촬영까지 다녔습니다. 솔직히 이 대목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정말인가" 싶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마릴린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단역 오디션 하나를 위해 일주일간 거울 앞에서 걸음걸이를 연구하다가 하이힐의 한쪽 굽을 일부러 깎아 비대칭을 만들면 골반이 더 자연스럽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른바 마릴린 먼로 워킹(Marilyn Monroe walk)이라 불리는 그 특유의 걸음새가 여기서 탄생한 셈입니다. 30초짜리 단역이 3분짜리 장면으로 늘어났고, 감독은 인터뷰마다 마릴린을 언급했습니다.
언론이 그녀의 불우한 가정사를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대중의 관심이 커졌고, 이때 에이전트 조니 하이드(Johnny Hyde)가 등장합니다. 30년 경력의 에이전시 부사장으로, 마릴린에게 7년 계약을 제시한 인물입니다. 에이전시(agency)란 배우와 제작사 사이에서 계약, 캐스팅, 홍보를 대행하는 전문 매니지먼트 기관을 말합니다. 조니 하이드의 도움으로 마릴린은 본격적으로 영화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백치미(blonde bombshell)라는 콘셉트가 시장에서 먹히기 시작했습니다. 백치미란 겉으로는 순진하고 모자라 보이지만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이미지로,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특정 여배우들에게 부여되던 캐릭터 유형입니다.
누드 화보가 본인 것임이 밝혀졌을 때, 마릴린은 당시 야구 스타 조 디마지오(Joe DiMaggio)의 조언을 따라 기자들 앞에서 "집세도 밀리고 차도 압류당해 50달러가 필요했다. 굶어서 그런지 복근이 선명하게 나오더라"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쿨한 자기 고백이 오히려 대중의 호감을 끌어냈고, 그해 기자 협회가 선정한 최고의 신인 여배우로 뽑혔습니다. 위기를 홍보로 바꾼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 위트가 생존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지 소비 — 가면이 된 미소, 그 안의 사람
스타가 된다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닐 수 있다는 걸, 마릴린의 삶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릴린이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의 소설 속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기자가 "스펠링은 아느냐"고 비꼬았다는 일화는, 그 시대 언론이 그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제가 이 부분이 유독 불편하게 느껴진 건, 그 시선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릴린은 두 번의 유산을 겪었습니다. 그 슬픔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소속사는 "여배우의 생명은 이미지"라며 절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요구했고, 마릴린은 병원 문을 나서는 그 순간에도 풀 메이크업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어야 했습니다. 퍼소나(persona)라는 심리학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퍼소나란 사회적 역할을 위해 쓰는 가면, 즉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마릴린의 삶은 퍼소나가 내면의 인간을 집어삼킨 사례처럼 보입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케네디 대통령과의 내연 관계 소문, 그리고 36세라는 이른 나이에 맞이한 죽음. 공식 사인은 약물 과다복용이었습니다. 당시 처방된 약물들은 현대 의학에서는 사용을 기피하는 수준의 위험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타살설도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다룰 때 저는 항상 사실(fact)과 전설(legend)을 구분하려 합니다. 유명인의 삶은 죽은 뒤에도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재구성되기 쉽기 때문입니다(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
그럼에도 제가 마릴린의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머문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전 남편 조 디마지오가 20년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 그녀의 무덤에 장미꽃을 놓아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총 1,000송이가 넘는 장미. 그리고 임종 직전 "드디어 마릴린을 볼 수 있겠구나"라고 했다는 말. 디마지오가 결혼 당시 가정적인 아내를 원해 갈등을 빚었던 사람이라는 사실과, 이 헌신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모순이 마릴린의 삶 전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아름답고, 복잡하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출처: History.com).
자주 묻는 질문
Q. 마릴린 먼로는 왜 그렇게 많은 양부모 가정을 전전한 건가요?
A.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정신증으로 강제 입원되면서 유일한 보호자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국가의 위탁 양육 제도에 따라 가정을 배정받았는데, 당시 미국에서는 양육 의지보다 보조금을 목적으로 신청한 위탁 가정도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탁 양육 제도는 달라졌을까요? 국가마다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개선 과제가 남아 있는 분야입니다.
Q. 마릴린 먼로가 샤넬 No.5를 유명하게 만들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네, 사실입니다. 기자가 잠옷에 대해 묻자 "잠잘 때 제 몸을 감싸는 건 오직 샤넬 넘버 파이브뿐"이라고 답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촬영 환경이 열악해 샤워가 어려운 날도 있었기 때문에 잠자리에서도 향수를 뿌렸던 것인데, 이 발언 이후 샤넬 No.5의 판매량이 급상승했고 지금도 30초당 한 병씩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남아 있습니다. 한 마디가 브랜드의 역사를 바꾼 경우가 또 있을까요?
Q. 마릴린 먼로와 케네디 대통령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가요?
A.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없습니다. 생일 파티 공연 장면, 마사지사의 증언 등 정황적 요소들이 불륜설에 힘을 실었지만, 이는 추측과 전언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유명인의 삶은 사후에도 자극적인 방향으로 재구성되기 쉬운 만큼, 확인된 사실과 소문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Q.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와 이혼한 뒤에도 왜 계속 곁에 있었나요?
A. 디마지오는 이혼 후에도 유일하게 친구 관계를 유지한 전 남편이었습니다. 마릴린이 우울증으로 강제 입원됐을 때 달려와 퇴원을 도왔고, 사망 후 장례식을 주관하며 20년간 무덤에 장미꽃을 놓아줬습니다. 결혼 당시 갈등의 원인이었던 사람이 끝까지 가장 헌신적인 존재였다는 점은, 사랑이 늘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론
마릴린 먼로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서 제가 느낀 건, 우리가 기억하는 '마릴린 먼로'는 사실 그녀가 만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미디어가 증폭시키고, 그 틀에 맞춰 살아남기 위해 마릴린 스스로도 그 이미지를 활용했습니다. 자신을 가둔 이미지가 동시에 자신을 살게 해준 도구였던 셈입니다. 그 모순 안에서 36년을 살았다는 게, 단순히 비극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만약 마릴린 먼로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면, 화보나 영화 장면보다 그녀가 직접 남긴 인터뷰나 일기 기록을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스타의 이미지가 아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제야 마릴린 먼로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