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 킬리언 머피를 의식하게 된 건 <피키 블라인더스>를 보다가였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인데, 그 짧은 순간에 긴장감이 화면 밖으로 새어 나왔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죠. 데뷔작인 <28일 후>의 올 누드 장면부터 <오펜하이머> 주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재능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텅 빈 런던 거리와 스케어크로우 — 조연 시절의 밀도
킬리언 머피의 데뷔작은 2002년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 <28일 후>입니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28일 만에 깨어나는 장면부터 시작하는데, 그 오프닝이 올 누드로 촬영됐습니다. 저예산 공포 영화의 첫 장면이 이 정도 용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범상치 않았죠.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는 건 사실 누드 장면이 아닙니다. 주인공이 텅 빈 런던 거리를 혼자 걸어 다니는 장면입니다. 대사가 거의 없는데도 당황스러움과 고립감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실제로 런던 시 협조를 받아 차량과 인원을 모두 통제한 뒤 단 몇 분 만에 촬영했고, 킬리언은 NG 없이 단 한 번에 장면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민폐를 줄이기 위한 현실적 이유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압박이 연기의 진정성을 높인 셈이 됐습니다.
이 영화가 장르사(史)에서 갖는 의미도 짚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28일 후>는 맹수처럼 전력 질주하는 패스트 좀비(Fast Zombie)를 대중 영화에서 처음으로 본격화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패스트 좀비란 기존의 느릿느릿 걷는 언데드 대신 인간의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돼 짐승처럼 달리는 새로운 유형의 감염체를 가리킵니다. 육상 선수를 섭외해 좀비 역을 맡겼는데 너무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배우들이 진짜로 잡힐 뻔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이 설정은 이후 <월드워 Z>, <나는 전설이다>, 그리고 국내의 <부산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저예산 영화임에도 제작비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인 데는 이처럼 장르의 문법을 새로 쓴 신선함이 컸다고 봅니다.
흥행 이후 킬리언은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의 주연 오디션을 제안한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상대는 크리스찬 베일이었고, 결과는 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그를 놓치지 않고 <배트맨 비긴즈>의 빌런 스케어크로우 역을 제안했습니다. 스케어크로우란 두려움을 주제로 한 인물로, 독성 환각 물질을 이용해 상대방의 공포를 증폭시키는 캐릭터입니다. 놀란 감독은 킬리언 특유의 차갑고 빨려 들어가는 눈빛을 가리는 것이 아깝다며 복면 착용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각본가의 고집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얼굴을 가렸다는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연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매 장면에서 존재감을 지웠다 켰다 하는 연기. 제가 <배트맨 비긴즈>를 처음 봤을 때 스케어크로우가 주연급 빌런처럼 느껴진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분량이 아니라 밀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놀란 감독은 이후 <인셉션>, <덩케르크>에서도 그를 계속 불러 썼고, <덩케르크>에서는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 병사를 연기하면서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 즉 전쟁이나 사고처럼 극심한 충격을 겪은 뒤 지속적으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심리 상태 — 를 섬세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 <28일 후>: 패스트 좀비 장르의 기원. 제작비 대비 10배 이상 흥행, 장르사의 전환점
- <배트맨 비긴즈>: 배트맨 오디션 탈락 후 스케어크로우로 캐스팅, 3부작 전편 출연
- <덩케르크>: 이름 없는 병사로 PTSD 연기, 조연에서도 압도적 존재감
피키 블라인더스와 오펜하이머 — 몰입의 방법론
킬리언 머피를 이야기할 때 <피키 블라인더스>를 빼면 절반도 설명이 안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버밍엄을 배경으로 한 범죄 느와르 드라마인데, 킬리언은 갱단 피키 블라인더스의 리더 토마스 셸비를 연기했습니다. 느와르(Noir)란 어둠, 도덕적 모호함, 인간의 욕망과 비극을 핵심 정서로 삼는 장르적 특성을 가리킵니다. 9년간 6시즌을 방영한 이 드라마는 마지막 시즌이 오히려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드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출처: IMDb, Peaky Blinders 시리즈 정보).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토마스 셸비가 침묵할 때였습니다. 말없이 담배를 피우며 상대를 바라보는 장면이 대사 10줄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했습니다. 이건 단순히 표정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킬리언은 한 캐릭터를 맡으면 실생활에서도 그 인물처럼 바뀌어간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런 메소드 연기(Method Acting) — 배우가 촬영 밖에서도 캐릭터의 심리와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역할과 완전히 동화되는 연기 방법론 — 가 화면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촬영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집에서 캐릭터를 벗어나지 못해 가족이 힘들었다는 건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해봤습니다. 메소드 연기를 칭찬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반대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체중을 극단적으로 줄이거나 일상생활까지 배역에 잠식당하는 방식이 배우 본인과 가족에게 지속 불가능한 부담을 주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저도 그 의견이 맞다고 봅니다. 15년간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수천 개비의 허브 담배를 피워가며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아름다운 노력으로만 포장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연기를 위한 헌신과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 사이의 경계는 분명히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오펜하이머>에서 킬리언의 노력은 또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원자폭탄의 설계를 주도한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연기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는 네덜란드어 단어 3만 개를 암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오펜하이머 박사가 외국어를 단기간에 익혀 강의까지 했다는 기록이 있고, 킬리언은 그 사실을 재현하려 했습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53년의 배우 경력에서 이렇게까지 준비하는 배우는 처음 봤다고 말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결과적으로 <오펜하이머>는 박스오피스 모조 집계 기준 전 세계적으로 오프닝 신기록을 여럿 경신하며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제가 <오펜하이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폭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핵실험 성공 이후 트리니티(Trinity) 실험 — 역사상 최초의 핵폭탄 폭발 실험을 가리킵니다 — 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눈빛이었습니다. 기쁨인지 공포인지 죄책감인지 알 수 없는 그 표정 하나로 이 인물이 앞으로 짊어지게 될 무게가 전부 전달됐습니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면서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방식, 그게 킬리언 머피가 다른 배우들과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도 아일랜드에 거주합니다. 할리우드 주연급 스타가 된 뒤에도 미국으로 이사하지 않고 고향을 지키는 선택을 했습니다. <피키 블라인더스> 촬영을 위해 영국에 머물다 자녀들의 말투가 영국식으로 바뀌어가자 바로 아일랜드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에서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SNS보다 아날로그 감성을 선호하고, 유명세보다 가치관을 앞에 두는 사람입니다. 이런 태도가 오히려 배역에 대한 진심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킬리언 머피 데뷔작이 뭔가요?
A. 2002년 공개된 <28일 후>가 킬리언 머피를 처음 세상에 알린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였는데, 저예산 영화임에도 제작비의 10배 이상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고 패스트 좀비라는 장르적 흐름을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주인공이 텅 빈 런던 거리를 걷는 장면은 지금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납니다.
Q. 킬리언 머피가 배트맨 오디션을 봤다는 게 사실인가요?
A. 사실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에서 킬리언에게 배트맨 역 오디션을 제안했고, 실제로 배트맨 수트까지 입고 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에게 밀려 탈락했지만, 놀란 감독은 그를 스케어크로우 역으로 캐스팅해 3부작 전편에 등장시켰습니다. 탈락이 오히려 놀란 감독과의 긴 인연을 만든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피키 블라인더스 헤어스타일이 왜 유명해진 건가요?
A.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출연진 전원이 1920년대 갱단 고증을 위해 투블럭 컷을 하고 등장했습니다. 드라마 인기가 폭발하면서 데이비드 베컴, 브래드 피트 같은 유명인들까지 이 헤어스타일을 따라 했고, 영국에서는 아예 드라마 이름을 따서 '피키 컷'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킬리언 머피 본인은 이 헤어스타일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Q. 오펜하이머 촬영 준비 일화 중 네덜란드어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A. 네,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실제 오펜하이머 박사가 짧은 시간 안에 네덜란드어를 익혀 강의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킬리언은 그 역할에 동화되기 위해 짧은 휴가 기간 동안 네덜란드어 단어 3만 개를 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함께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을 때 이렇게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결과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배역에 이 정도로 진심인 배우는 드물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Q. 킬리언 머피가 채식주의를 그만둔 이유가 뭔가요?
A. <피키 블라인더스>에서 갱단 리더를 연기하기 위해 근육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5년간 유지했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육식을 시작했는데, 기자들이 동물 사랑으로 채식을 한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광우병이 무서워서였다"고 답해 질문한 이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본인만의 솔직함과 유머가 담긴 답변이었습니다.
결론
킬리언 머피를 오래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하나입니다. 그는 빠르게 주목받는 것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신뢰를 쌓는 쪽을 선택해왔다는 것입니다. 음악으로 성공할 기회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포기했고, 배트맨 오디션에서 탈락한 자리에서 스케어크로우로 시작했으며, 20년 가까이 조연을 거쳐 마침내 <오펜하이머>의 주연에 올랐습니다. 그 과정이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인상적입니다.
메소드 연기와 극단적인 자기 소진을 무조건 미화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려한 유명세보다 아일랜드라는 고향과 가족,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면서 꾸준히 한 가지 일을 진지하게 대해온 태도만큼은 배우를 넘어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킬리언 머피의 필모그래피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을 기대합니다.